인도주의 관점에서 남북이 한 발씩 물러설 때
'금강산 시설 몰수 조치'에 발 묶인 이산가족 상봉행사
2010년 09월 30일 (목) 20:08:40 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추석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위해 10월 1일 남북이 또다시 머리를 맞댄다. 그러나 남북이 각자의 정치 셈법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바라보고 있어 합의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지난 17일, 24일 두 차례 적십자 실무접촉을 진행하면서 남북의 의견차는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지금까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합의하지 못한 책임 공방전과 기싸움까지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남북 책임공방... 서로 다른 주장

남북은 회담이 끝나자마자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합의하지 못한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기에 바빴다.

지난 25일 북측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애당초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을 위한 실무접촉에 마지못해 나온 남측은 첫 시작부터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쌍방이 전번 접촉에서 합의한 상봉 날짜와 명단교환 날짜 등을 모두 뒤집으며 늦잡자고 했다"고 주장했다.

또 "우리측이 남측의 제안을 대범하게 받아들여 상봉장소를 금강산면회소로 할데 대한 문제를 쌍방 관계자들 사이에서 협의하자고 하자 남측은 황급히 면회소주장을 철회하면서 상봉장소를 다른 곳으로 하자고 하는 등으로 문제토의에 계속 인위적인 난관을 조성하였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한 남측의 주장은 다르다. 첫 번째 접촉에서 상봉날짜(10.21-27)는 '합의'한 것이 아니라 '의견접근'을 이룬 것뿐이며 행사 합의가 늦어진 만큼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해당 날짜에 행사를 치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첫 번째 접촉을 마치고 귀환한 김의도 남측 수석대표는 도라산 출입사무소에서 "상봉날짜를 합의했다"고 밝혀, 정부 내에서도 서로 말을 맞추지 못했다. 이는 상봉장소 해결 전에 행사에 합의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전략에 따라 '합의'를 '의견접근'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남측이 황급히 상봉장소를 다른 곳으로 제안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북측이 금강산 이산면회소에서 행사가 불가능하다고 고집해서 다른 곳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측도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치른다면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면서 "북측은 금강산 지구 내의 모든 시설이 몰수.동결되었다면서 구체적인 상봉 장소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강산 몰수.동결 조치에 대한 서로 다른 셈법

이산가족 상봉행사 합의에 최대 걸림돌은 금강산 관광 지구 내 상봉행사 장소를 결정하는 문제다. 이는 지난 4월 북한이 취한 금강산 관광 지구 내 남측 시설에 대한 동결.몰수 조치와 연결되어 있다. 이 조치가 해결되어야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금강산 시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 모두 금강산 시설에 대한 동결.몰수 조치가 풀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목적이 다르다. 북측은 동결.몰수 조치는 금강산 관광 중단에 따라 취한 조치이기 때문에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어야 이 조치를 해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남측은 북측이 일방적으로 취한 조치이기 때문에 금강산 관광 재개와 상관없이 이 조치를 스스로 풀어야 한다며 맞서고 있다.

세부적인 입장을 바라보면 남북의 정치적 셈법은 더욱 복잡해진다. 북측은 일단 적십자 실무접촉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대한 합의서를 채택하고 나서, 구체적인 장소 사용 문제는 별도의 당국 간 접촉을 통해 해결하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남측은 상봉장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합의서를 채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장소 문제를 남겨놓고 이산가족 상봉행사부터 합의해 버리면,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로 끌고 가려는 북측의 의도에 말릴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같이 밀고 당기는 싸움 속에서 남측은 '이산가족 상봉을 안 해도 된다'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25일 "북한이 금강산 관광 재개를 이산가족 상봉의 전제조건으로 끝까지 걸고 나온다면 이산 상봉행사를 안 해도 좋다는 게 정부입장"이라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 관련 추후 협의' 수준에서 상봉행사 합의해야

북한은 사실상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전제조건으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요구하고 있고, 남측은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통해 금강산 시설에 대한 동결.몰수 조치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셈법에 따라 남북이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고통 받는 이들은 남과 북에 갈라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이다. 이번에는 만날 수 있을까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밤잠을 설칠 이산가족에게 이러한 정치적 셈법은 너무나 가혹하다.

10월 1일 추가 접촉에서 남북이 상봉행사를 합의하지 못하면 추석계기 이산가족 상봉이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더 이상 공방전과 기싸움을 벌이기에는 시간이 없다. 남북은 정치적 셈법이 아닌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한 발짝씩 물러서야 할 때다.

북측은 금강산 관광재개를 당장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한해서라도 동결.해제 조치를 잠정적으로 풀어야 한다.

남측도 관광객 피격사건과 천안함 사건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면서 북한의 입장변화가 없는 한 금강산 관광 관련 회담도 열 필요도 없다는 경직된 태도에서 벗어나, 추후 금강산 관광에 대해 계속 협의하는데 유연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남측이 요구하는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위해서라도 결국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논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산가족이라는 인도주의적 문제가 남북 간 복잡한 정치적 셈법을 풀어나가는 열쇠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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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중앙통신, 2010.09.29>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김영남  

주체17(1928)년 2월 4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출생. 대학졸업후 중앙당학교 교원,당중앙위원회 부부장,외무성 부상,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부장,비서,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을 거쳐 주체87(1998)년 9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최영림   

주체19(1930)년 11월 20일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7월 인민군대 입대. 대학졸업후 경제기사의 자격 받음. 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부부장, 제1부부장, 부장, 금수산의사당 서기실 책임서기, 정무원 부총리, 중앙검찰소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평양시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6월부터 내각총리로 사업.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조명록

주체17(1928)년 7월 12일 함경북도 연사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12월 인민군대 입대. 항공학교졸업후 대대장,련대장,사단장,공군사령부 참모장,사령관,총정치국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2월부터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리영호   

주체31(1942)년 10월 5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출생. 주체48(1959)년 8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졸업후 사단 참모장,군단 작전부장,훈련소 참모장,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부총참모장, 훈련소 소장을 거쳐 주체 98(2009)년 2월부터 총참모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김영춘  

주체25(1936)년 3월 4일 량강도 보천군에서 출생. 주체45(1956)년 7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졸업후 군단 작전부 부부장,총참모부 정찰국 참모장, 국장, 부총참모장 겸 작전국장,훈련소 소장,군수동원총국장,군단사령관,총참모장,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2월부터 인민무력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전병호   

주체15(1926)년 3월 20일 자강도 전천군에서 출생. 주체34(1945)년 10월 적위대 입대. 대학졸업후 금속공학주물기사의 자격 받음. 26호공장 부기사장, 국가계획위원회 부장,강계뜨락또르공장 기사장,당중앙위원회  부부장, 부장, 제2경제위원회 부위원장,1부위원장 겸 당책임비서,위원장,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내각 정치국 국장,당책임비서로 사업.

정치국 위원 김국태  

주체13(1924)년 8월 27일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출생. 고급당학교 졸업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부부장,부장,인민군총정치국 부국장, 사회안전성 정치국장,김일성고급당학교 교장,당중앙위원회 부장,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김기남  

주체18(1929)년 8월 28일 함경남도 금야군에서 출생.대학졸업후 경제전문가의 자격 받음. 김일성종합대학 교원,학부장,당중앙위원회 부부장,로동신문사 책임주필,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부장,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5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최태복  

주체19(1930)년 12월 1일 남포시 항구구역에서 출생. 대학졸업후 김책공업대학 교원,학부장,학장,교육위원회 위원장 겸 고등교육부장을 거쳐 주체75(1986)년 12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사업.

정치국 위원 양형섭   

주체14(1925)년 10월 1일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강구역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6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중앙당학교 교장,고등교육상, 당중앙위원회 비서,사회과학원 원장,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을 거쳐 주체87(1998)년 9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강석주   

주체28(1939)년 8월 29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 대학졸업후 외무성 지도원,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외교부 부부장,외무성 제1부상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내각부총리로 사업.

정치국 위원 변영립  

주체18(1929)년 9월 20일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9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물리전문가의 자격 받음. 김일성종합대학 강좌장,고등교육성 국장,교육위원회 1부부장,국가과학원 부원장 ,교육상,국가과학원 원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7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리용무   

주체14 (1925)년 1월 25일 평안남도 평성시에서 출생. 주체36(1947)년 6월 중앙경위대대 입대. 제2중앙정치학교졸업후 총정치국 지도원,사단 정치부장,사단장,총정치국 조직부장,조직부국장,제1부국장,총정치국장,국가검열위원장,사회안전부 정치국장,교통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국장을 거쳐 주체87(1998)년 9월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주상성   

주체22(1933)년 8월 1일 강원도 문천시에서 출생. 주체40(1951)년 6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대학졸업후 군단 작전상급참모,려단장,사단장,지구사령부 참모장,군단사령관,총참모부 검열관을 거쳐 주체93(2004)년 7월부터 인민보안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홍석형   

주체25(1936)년 10월 1일 서울시에서 출생. 대학졸업후 금속공학기사의 자격 받음. 성진제강소 기술부기사장,금속공업부 제1부부장,김책제철련합기업소 기사장, 함북도당 제2비서 겸 김책제철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국가계획위원장,함북도당 책임비서, 당중앙위원회 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계획재정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리태남   

주체27(1938)년 3월 26일 평안북도 염주군에서 출생. 평양기계대학졸업후 금속가공기사의 자격 받음.  탄광기계공장 직장장, 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과장,과장,강선제강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남포시행정경제위원장,황해제철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도당책임비서를 거쳐주체99(2010)년 6월부터 내각부총리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락희  

주체22(1933)년 11월 11일 평안남도 개천시에서 출생. 인민경제대학 졸업후 협동농장관리위원장,군협동농장경영위원장,도농촌경리위원장, 당중앙위원회 부부장,황남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6월부터 내각 부총리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태종수   

주체25(1936)년 3월 20일 함경북도 명간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9월 인민군대 입대. 대학졸업후 기계제작기사의 자격 받음. 보통교육성 교학,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도당비서,기계공장 지배인, 선박공업부장,대안중기계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내각부총리,함남도당 책임비서,당중앙위원회 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총무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평해  

주체30(1941)년 10월 8일 자강도 전천군에서 출생. 주체49(1960)년 2월 인민군대 입대. 사범대학졸업후 도당 지도원,과장,부부장,당중앙위원회 지도원,도당 부장,조직비서,평북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간부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우동측   

주체31(1942)년 8월 8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철학전문가의 자격받음.  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과장,국가안전보위부 국장,부부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9월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정각  

주체30(1941)년 7월 20일 평안남도 증산군에서 출생. 주체48(1959)년 8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졸업후 대대장,군단 부사령관,훈련소 참모장,소장,인민무력부 부부장을 거쳐 주체96(2007)년 3월부터 총정치국 제1부국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박정순   

주체17(1928)년 7월 1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7월 인민군대 입대. 중앙당학교졸업후 군당부부장,도당지도원,당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함남도당 제2비서,당중앙위원회 과장,부부장,평양시당 조직비서,당중앙위원회 부부장,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창섭  

주체35(1946)년 1월 2일 평안남도 은산군에서 출생. 주체52(1963)년 7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고급당학교졸업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책임지도원,부과장,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정치국 부국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8월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정치국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문경덕   

주체46(1957)년 10월 12일 평양시 대성구역에서 출생. 주체62(1973)년 10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정치경제학전문가의 자격 받음. 평양시당 지도원,사로청중앙위원회 부위원장,2호지도국장,당중앙위원회 부부장,평양시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평양시당 책임비서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양건  

주체31(1942)년 4월 24일 평안남도 안주시에서 출생. 주체48(1959)년 8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프랑스어 및 문학전문가의 자격 받음. 사로청중앙위원회 지도원,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부부장,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영일  

주체36(1947)년 3월 17일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출생. 국제관계대학졸업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외무성 국장,부상,당중앙위원회 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국제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박도춘   

주체33(1944)년 3월 9일 자강도 랑림군에서 출생. 주체49(1960)년 10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고급당학교졸업후 광산당비서,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과장,과장,도당 비서 겸 부장,자강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최룡해
주체39(1950)년 1월 15일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출생. 주체56(1967)년 9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정치경제학전문가의 자격 받음. 사로청중앙위원회 부부장,부장,부위원장,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1비서,당중앙위원회 부부장,황북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장성택   

주체35(1946)년 1월 22일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에서 출생.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평양시당 지도원,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과장,과장,부부장,제1부부장,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6월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주규창   

주체17(1928)년 11월 25일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3월 인민군대 입대. 대학졸업후 기계공학기사의 자격 받음. 국방과학원 부원장,제1부원장,원장,당중앙위원회 부부장,제2경제위원회 위원장,제2자연과학원 원장,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기계공업부장으로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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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3남 김정은의 성장과정, 자질과 후계자 결정 배경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은의 성장과정에 대해 현재 해외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은 1988년부터 1996년까지, 그리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김정일의 요리사로 11년간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임.

- 그는 북한의 당과 군대, 국가의 고위간부들이 참석하는 연회뿐만 아니라 김정일 가족의 생일파티를 준비하였고, 김정일의 바캉스에도 동행함으로써 김정은의 개인적 신상정보와 자질, 위상 등에 대해 잘 알게 됐음.

- 그래서 필자는 2008년 12월 일본을 방문하여 후지모토 겐지와 장시간 북한의 주요 엘리트와 김정은의 위상 등에 대해 심층적인 인터뷰를 진행하였음.

- 아래에 소개하는 김정은의 성장과정은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 『김정일의 요리사』, 필자의 그와의 인터뷰, 그리고 기타 자료 등을 참고해 정리한 것임.

   

1) 김정은의 성장 과정과 자질

 

○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은 고영희와 김정일 사이에서 1983년 1월 8일에 태어났음.

- 김정일은 고영희를 1975년경에 만나 1976년경부터 동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일본과 남한의 일부 연구자들은 고영희가 북한 유도의 창시자인 고태문의 딸이라고 주장해왔으나, 남한 정보당국은 고영희가 1999년 사망한 재일동포 고경택의 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

- 김정은에게는 김정철이라는 친형과 김여정(또는 김일순)이라는 여동생이 있음.

- 김정철은 1980년생이고, 김여정은 1987년생이다.

 

○ 필자는 그동안 여러 논문에서 군주제 국가에서 군주의 생일이 가장 중요한 명절인 것처럼,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이 ‘최대명절’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음.

- 그리고 북한이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후계자 결정이 1974년 그의 생일 바로 3일전인 2월 13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고, 김정일의 아들 중 하나가 후계자로 결정되는 것도 그의 생일을 전후하여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왔음.

- 필자가 예상했던 바와 같이 김정은은 바로 그의 생일 날 김정일의 후계자로 결정되었음.

 

○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김정은을 처음 만난 곳은 신천초대소였는데, 그 때 김정은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함.

- 이는 김정일이 아들들을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키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함.

 

○ 김정은은 후지모토 겐지를 처음 만나 악수할 때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았음.

- 후지모토 겐지는 ‘이 녀석은 증오스러운 일본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듯한 김정은의 당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수기에 적었음.

- 김정은이 어려서부터 대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임.

 

○ 김정은의 이 같은 면모는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김정일이 그를 통이 크게 키운데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을 것임.

-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음식이라면 술도 마시게 했고, 7세부터 초대소 안에서 벤츠600형을 운전하게 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에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작은 왕자 정은”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수기에 ‘초등학생’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잘못 쓰여진 것이라고 밝혔음.

- 그에 의하면 김정철과 김정은은 북한에서 정식으로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며, 장성택이 이들의 교육 문제를 담당했음.

- 장성택은 고모부로서 김정철 및 김정은의 성장과정에 밀접하게 관여한 셈임.

 

○ 북한에는 ‘초대소’라고 불리는 호화 별장이 곳곳에 있는데, 그 중 평양 근처에 위치한 강동(별칭 ‘32호’)초대소에는 김정일 전용의 ‘장군 건물’, 고영희와 그녀의 자녀들을 위한 ‘1호 건물’,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와 남편 장성택(현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부부를 위한 ‘2호 건물’, 그리고 초대소 내부를 총괄하는 ‘본관 건물’이 있음.

- 초대소의 이 같은 구성은 외부세계에서 김정남의 ‘후원자’로 간주되는 장성택이 실상은 고모부로서 김정은과 가깝게 지냈음을 보여줌.

- 후지모토 겐지는 바로 이 강동초대소에서 김정철, 김정은에게 당구를 가르쳤고, 그 후 이들은 줄곧 당구를 즐긴 것으로 보임.

 

○ 김정은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그가 12세 때 여동생이 그에 대해 ‘작은 오빠’라고 부르자 화를 냈다는 일화에서도 나타남.

- 그 사건 이후 후지모토 겐지는 정철에게 ‘큰 대장동지’라고 부르고, 정은에게는 ‘작은’을 빼고 ‘대장동지’라고 불렀다고 함.

- 이처럼 정은은 상당히 기가 셌음.

- 그는 스포츠에도 만능이며, 김정일처럼 영화도 좋아했다고 함.

- 2009년 1월 8일 후계자 결정 이후 김정은은 북한에서 ‘김대장’ 또는 ‘청년대장’으로 불려왔는데,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을 통해 이미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대장’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음.

 

○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이 김정은을 편애하고 있음이 가족의 식사자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술회하고 있음.

- 식탁에서 김정일이 가운데 앉고, 그 왼쪽에 부인 고영희가 앉았으며, 김정은은 고영희 왼쪽에 앉았음.

- 그리고 딸 김여정이 김정일 오른편에 앉았고, 김정철은 김여정의 오른쪽에 앉았음.

- 그래서 부인 고영희가 빠질 경우 김정은은 김정일 바로 옆자리에 앉았지만, 김정철은 늘 김정일 옆에 앉지 못했다는 것임.

 

2)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 국내외에서 알려진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에 대한 정보 중엔 부정확한 것이 많음.

- 스위스의 프랑스어 시사주간지 렙도(L'Hebdo)는 2009년 3월 5일자 기사에서 김정은이 베른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Berne)를 ‘박철(Pak Chol)’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고 보도했음.

- L'Hebdo의 이 같은 보도를 국내외의 많은 언론들은 무비판적으로 소개했는데, 베른국제학교를 ‘박철’이라는 가명으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다닌 것은 3남 김정은이 아니라 차남 김정철임.

 

○ 김정철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베른에 유학한 사실은 이미 2006년에 국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일본인 오오노 가즈모토(大野和基)씨의 스위스 현지 취재에 의해 밝혀진바 있고, 국내의 한 월간지를 통해서 상세히 소개된 바 있음.

- 필자도 김정철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2008년 8월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김정철의 베른국제학교 재학 시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음.

 

○ ‘박철(Pak Chol)’이라는 가명에서 ‘박’은 1998년 5월까지 스위스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의 망명한 외교관인 이모부 박건(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의 남편)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철’은 김정철의 이름 끝 글자에서 따온 것임.

- 공교롭게도 후지모토 겐지의 북한 이름도 박철이었음.

- 그래서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철이 자신을 좋아해서 베른국제학교에서 ‘박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와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음.

- L'Hebdo는 또한 ‘박철’의 성격에 대해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3남 김정은의 성격이 아니라 차남 김정철의 성격임.

 

○ 2009년 6월 14일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 보도에 의하면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가 아니라 자택 인근의 공립중학교를 ‘박운(Pak Un)’이라는 가명으로 다녔음.

- ‘박운(은)’이라는 가명에서 ‘박’은 스위스 외교관인 이모부 박건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운(은)’은 김정은의 이름 끝 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임.

 

<사진> 마이니치신문이 공개한 김정은의 스위스 베른중학교 시절 16세의 모습

 

○ 필자는 잘 아는 사이인 일본 주간 겐다이(週刊現代)의 콘도 다이스케 부편집장에게 마이니치신문의 보도 직후 전화를 해서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해 공개한 김정은의 16세 때 사진의 진위여부에 대해 후지모토 겐지의 견해를 물어보게 하였음.

- 그랬더니 후지모토 겐지는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한 사진이 “100%” 맞고, “그 사진을 보면서 과거에 김정은과 같이 놀았던 시절이 생각났다”고 대답했다고 함.

 

○ 김정은은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베른에 체류했음.

- 처음에 1년간 외국어교육학생반에 있다가 6학년 때 정규반으로 옮겼으며, 그후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서 7학년과 8학년을 이수하고 고등학교 단계인 9학년에도 일정 기간 재학하다가 2000년 말에 학교를 그만 뒀음

 

○ 김정운이 다녔던 베른의 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측은 “북한 외교관 자녀의 신분으로 1998년 8월부터 2000년 가을까지 북한 출신의 한 학생이 재학했다”고 2009년 6월 15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음.

- 이 기자회견에서 베른 칸톤(州) 쾨니츠 게마인데(區)의 윌리 슈투더 구청장은 “이 학생은 잘 어울렸으며 부지런하고 야심에 차 있었다”면서 “그의 취미는 농구”라고 말했음.

- 김정은이 다녔던 학교의 현재 교장이자 당시 수학 교사였던 페타 부리(52)씨는 김정은에 대해 “나는 그 학생을 기억하지만 직접 가르친 적은 없다”고 말하고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그 학생이 잘 어울리고, 부지런하고, 야심 찬 학생이었다는 것 뿐”이라고 덧붙였음.

 

○ 김정은은 농구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는 친형인 김정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됨.

- 스위스 유학시절 김정철은 특히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로 7년 연속 리바운드 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데니스 로드맨을 좋아했으며, 언제나 로드맨의 등번호가 새겨진 시카고 불스 티셔츠를 입고 농구를 했음.

- 후지모토는 1996년에 일본에 귀국했다가 1998년 북한에 돌아와서는 과거 김정철과 김정은이 사용하던 체육관이 멋진 농구 코트로 변했으며 각종 기구도 미 NBA에서 쓰는 것과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됨.

- 오랜만에 김정철과 김정은을 다시 보게 된 후지모토 겐지는 “2년 사이에 두 사람 다 몰라볼 정도로 키가 자랐으며 근육도 붙어 있었다”고 회고했음.

 

○ 김정은은 어려서부터 강한 승부욕과 리더십을 보여 왔음.

- 반면 그의 형 김정철은 어렸을 때부터 화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야망이 없기 때문에 북한을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말했음.

- 정철팀과 정은팀이 농구시합을 한 후 정철은 팀원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데 비해 정은은 오랜 시간 반성회를 가졌음.

- 김정은은 팀원들에게 “네가 왜 그쪽으로 패스했느냐? 더 연습하라!”고 지시했다고 함.

- 그의 승부욕과 보스 기질을 확인해주는 대목임.

 

○ 김정은에게는 강한 면만 있는 것이라 아니라 사람을 감동시키는 세심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임.

- 2000년 7월 김정일 일가와 백두산에 올랐을 때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과 안개 속에서 나란히 소변을 보게 되었음.

- 그 때 후지모토 겐지가 그에게 “혹시 내 것 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보이지 않았다고 대답한 그 마음 씀씀이에 후지모토 겐지는 감동했다고 회고하고 있음.

 

○ 또한 백두산에서 마실 맥주가 떨어져 무심코 김정은에게 이야기했더니 며칠 후 밤에 그가 후지모토 겐지의 방으로 찾아와 양쪽 바지 주머니에서 하이네켄 맥주를 두 병 꺼내면서 마시라고 내밀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는 그 때를 기억하며 김정은의 “그런 따뜻한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했다”고 수기에 적었음.

 

○ 장성택과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 간의 관계는 적어도 2003년 황장엽 전 비서가 한국 국회에서 개최된 토론회에서 김정일 이후 장성택이 차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함으로써 이후 장성택이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직무정지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것으로 보임.

- 1990년대 중반 김정일 패밀리가 식사하는 자리에서 김정일과 장성택이 싸운 적이 있었음.

- 이 때 장성택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김정일은 냅킨을 던지려 했고, 이를 고영희가 말렸음.

- 그 때 상황이 매우 심각했는데, 고영희는 장성택의 편이 되어 주었고, 당시 고영희와 장성택 간의 사이는 좋았다고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설명했음.

 

3)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와 장성택의 직무정지

 

○ 후지모토 겐지는 1992년 김정일이 부인 고영희 및 비서와 함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용 팩스 용지를 하나씩 검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수기에서 적고 있음.

- 이는 김일성이 사망하는 1994년 이전에 이미 김정일이 고영희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함.

 

○ 1990년대 말부터 고영희에 대해 북한 군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개인숭배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김정은의 북한 지도부 내 입지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하였음.

- 1998년경부터 북한군 특수부대인 민사행정경찰을 중심으로 시작된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는 2002년에 절정에 도달하였음.

- 북한 내부자료에서 고영희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동지와 꼭 같으신 분,” “인민군 장병들을 충성과 위훈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자애로운 스승” 등으로 치켜세워졌음.

- 이처럼 고영희가 북한 내부에서 ‘국모(國母)’로 내세워짐으로써 그와 김정일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김정철 또는 3남 김정은이 김정일과 성혜림 간에 태어난 ‘장남’ 김정남보다 후계자로 지명받기에 더욱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음.

 

○ 1998년에 미국에 망명한 고영숙과 그녀의 남편 박건은 고영희가 1990년대 초부터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대남 비서를 자기 측근으로 만들어 김정철, 김정은 형제의 후계자 옹립을 준비해왔다고 미 정보당국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김용순 대남 비서는 2000년에만 해도 김국태 비서와 함께 김정일 총비서의 각종 공개 활동을 각각 37회 수행하는 등 김 총비서의 최측근 인사였음.

- 고영숙은 또한 김용순 비서와 고영희가 특히 2001년 김정남이 일본 밀입국을 기도하다 적발돼 추방된 후 북한에 귀환하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인 후계자 옹립작업에 들어갔다고 주장했음.

- 고영숙의 진술이 어디까지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김용순 대남 비서가 음주운전으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 2003년 6월 16일이 고영희 생일이라는 점은 김 비서가 고영희 생일파티에 참석하고 돌아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함.

- 김용순 비서가 동년 10월 26일 사망함으로써 고영희는 중요한 측근 한 명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이후 리제강과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을 통해 김정철 또는 김정은의 후계자 옹립을 추진한 것으로 판단됨.

 

○ 고영희의 부상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중반 권력엘리트의 부침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됨.

- 고영희는 김일성 사후인 1995년경부터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에 동행하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2002년 시점에는 확고하게 제2인자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음.

- 이 같은 상황에서 2003년 7월 4일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가 한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탈북자․북한인권 문제 토론회’에 참석하여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고 지적하고, 장성택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고 발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음.

- 황장엽의 이 같은 발언은 김정철 또는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세우려던 고영희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음이 틀림없음.

- 그 결과 2003년 7월 이후 장성택의 공식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었으며 2004년에는 직무 정지되기에 이르렀음.

- 이는 고영희와 리제강, 리용철 등 그의 측근들이 한국 국회에서의 황장엽 발언을 빌미로 장성택을 김정일의 권력을 넘보는 ‘야심가’로 몰아 무력화시킨 결과로 해석되고 있음.

 

○ 고영희는 2004년 5월 26일 프랑스에서 유선암으로 사망하여 6월초에 북한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확인됨.

- 고영희의 사망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동년 8월 말이었음.

- 이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고영희 사망으로 인해 기존의 후계구도에 변화가 발생하였다는 주장들이 제기됐음.

- 물론 고영희의 사망으로 김정철과 김정은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 중 한명을 상실하게 되었음.

- 하지만 절대권력자 김정일의 마음이 김정남보다 여전히 그들에게 기울어져 있으므로 기존의 후계구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은 것이었음.

 

4) 김정은으로의 후계자 내정과 북한 엘리트들의 입장

 

○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는 북한사회에서 김정은은 단순히 김정일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의 아들이 아니라 ‘왕자’로서 성장했음.

- 사람들은 김정은을 ‘왕자님’이라고 불렀고, 김정은은 자신보다 나이가 31세나 더 많고 김정일의 스케줄을 관리했던 서기 김옥(김정일의 현 동거인)에게 ‘이모’나 ‘김옥 동지’도 아니고 그냥 ‘옥이’라고 불렀음.

- 이 같은 사실은 김정은이 어려서부터 특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함.

 

○ 김정은이 18세 때에 후지모토 겐지에게 “나는 매일 제트스키를 타고, 해양스포츠를 하고, 롤러블레이드․승마를 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은 어떻게 하고 있나?”라고 물은 적이 있음.

- 이 때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이 18세의 나이에 벌써 일반 사람들의 생활을 궁금해 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음.

 

○ 김정은은 원산, 신천, 평양 등 전국에 있는 초대소를 돌면서 자연스럽게 당과 군대 간부들을 만나 이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웠음.

- 후지모토 겐지는 이들 간부들도 자연스럽게 3대 세습을 통한 후계 계승을 생각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

 

○ 앞에서 김정일이 김정은을 편애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음.

- 후지모토 겐지는 고영희도 간부들과의 식사에서 김정철보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필자에게 말했음.

- 후지모토 겐지는 또한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면, 장성택이 100% 지원할 것이라고 내다봤음.

- 또한 김정일의 현부인인 김옥도 성격이 착한 사람으로서 야망을 갖기보다 김정은을 지원할 것이라고 전망했음.

- 이처럼 김정일 패밀리에서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임.

 

○ 결국은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되었지만, 2000년대 상반기까지만 해도 차남 김정철이 후계자로 결정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2003년 12월 말경,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책임일군들 앞에서 내년(2004)은 “내가 김일성 주석의 위업을 이어 간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나간 10년은 우리에게 간고하였지만 우리의 선군 령도가 천만번 지당한지 알게 해 주었다”고 말하면서 김정철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음.

- 그는 그 자리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이 백전백승의 력사와 전통을 이어 위대한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위업을 끝없이 빛내어 나가야 할 신성한 임무가 나서고 있다. 이를 위하여 자신처럼 김정철을 잘 받들어 보좌할 것”을 지시하였음.

- 당시 김정철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간부부 과장으로 막 승진하여 중앙당 내부에서 사업하고 있었음.

- 그러나 그 후 김정철이 김정일의 뒤를 이을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함에 따라 김정일의 마음이 3남 김정은에게로 기운 것으로 파악되고 있음.

 

○ 김정일은 자신을 닮아 적극적인 성격의 김정은을 더 좋아했음.

- 그래서 한 번은 식사 후 두 아들이 농구장으로 나가자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정철은 마음이 여려서 안 된다. 정운은 나하고 닮았다”고 말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김정은은 김정일의 얼굴을 쏙 빼닮았으며 체형까지도 흡사함.

- 아들들을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키우고자 어려서부터 군복을 입혔던 김정일이 김정철에 대해 “마음이 여려서 안 된다”는 평가를 굳히게 되었다면, 그의 마음이 대담한 성격의 3남 김정은에게 더 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임.

 

○ 한국의 정보 관련 기관들은 이미 2006년 초부터 “대북 소식통의 정보를 감안할 때 김 위원장에게서 가장 많은 총애를 받고 있고 자질과 리더십에서 우수한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기 시작했음.

- 그처럼 김정일이 김정은을 총애하고 있는 상황에서 2006년 6월 3~7일 김정철이 프랑크푸르트 등 4개 도시에서 개최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것이 일본 후지TV를 통해 보도됨으로써 당 지도부에서 김정철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됨.

- 주민들은 모두 경제난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데 지도자의 아들이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를 돌아다닌다는 것에 대해 지도부 내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짐.

 

김정은이 친형 김정철 대신 후계자로 내정된 시점은 2006년 말경인 것으로 판단됨.

-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에서 2001년에 귀국한 후 2002년부터 2006년 12월까지 군 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군사학을 공부했음.

- 북한 군대에서 2009년 5~6월경 작성되어 배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외비 문건인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이하 「위대성 교양자료」로 약칭)는 “의미 깊은 2006년 12월 24일,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증서와 기장이 기여된 자리에서 주체의 선군혁명위업을 빛나게 이으실 것을 바라시었다”고 언급하고 있음.

- 북한이 김정은의 졸업식 날과 ‘주체의 선군혁명위업 계승’ 의지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이때가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임.

 

○ 「위대성 교양자료」는 2006년 12월 24일 인민군 지휘성원 모두가 김정은이 북한에서 최초로 인공위성 자료와 GPS수신기 좌표를 이용해 만든 작전지도를 보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군사전략사상이 빛나게 구현된 기상천외하고 천별만화하는 만점 계획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 이 문건은 또한 김정일도 이 작전지도를 보고 “작전계획이 아주 창조적이고 착상이 기발하여 1~2번 감복한 것이 아니라고 의미 있게 말씀하셨다”고 언급하고 있음.

- 북한의 일반 대학생이 인공위성 자료와 GPS 수신기 좌표를 가지고 작전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임.

- 김정은이 이처럼 첨단정보를 가지고 작전지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김정일의 아들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임.

- 그리고 김정은이 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그가 김정일에게 인정받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수완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임.

- 북한군 내부 자료는 또한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시절에 보병지휘관 3년제와 연구원 2년제를 전과목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김정일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에서 대학이 김정일의 3남에게 그보다 낮은 성적을 줄 수는 없었을 것으로 판단됨.

 

김정은이 태어난 평북 창성의 고영희 관저는 김정은의 ‘혁명역사’를 칭송하기 위한 사적지로 지정되어 2007년 3월부터 2009년 1월까지 2년여에 걸쳐 극비리에 확장 개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김정일의 백두산 밀영 집과 같이 주민들에게 나중에 ‘혁명의 성지’로 교양하기 위한 김정은 고향집 사적지는 김정일의 명령으로 당중앙위원회 역사연구소의 지도하에 북한군 제1여단 연대의 특별건설대에 의해 완공되었다고 함.

- 이 같은 사실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사업이 적어도 2007년 3월 이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임.

 

김정은의 북한사회 전반에 대한 정책적 지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분야 등의 40~50대 최고 실력자들로 구성된 실무팀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은 2009년 초부터이지만, 이 실무팀이 구성된 것은 2007년임.

- 이 같은 사실도 2006년 말 또는 2007년 초에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임.

 

고영희 생존 시에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에 자주 동행했던 김정은은 2004년 고영희 사망 후 한동안 동행을 중단했다가 2007년부터는 다시 김정일의 공식활동에 동행하기 시작했음.

- 이처럼 김정은은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된 상태에서 후계수업을 받다가 2008년 여름 김정일이 뇌혈관계 이상으로 쓰러짐으로써 단기간에 후계자로 결정된 것으로 판단됨.

 

 

 



 

정 성 장(鄭成長), 정치학 박사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 수석연구위원,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정책위원장

우) 461-370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대왕판교로 400

세종연구소

TEL: (+82-31)750-7542 / FAX:(+82-31)723-6508

MOBILE: 010-5277-7969

E-mail: davidcheong@chol.com; sccheong@sejong.org   

 

CHEONG, Seong-Chang

Senior Fellow

Inter-Korean Relations Studies Program

The Sejong Institute

400 Daewang Pangyo-ro Sujeong-gu, Seongnam, Kyeonggi Province

461-370,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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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당대회 및 당대표자회 개최 현황

차 수

개최일

의제

참가 대표수

1차

당대회

'46.8.28-30

(3일간)

o 당 창립에 대한 보고

o 당 강령·규약·기관지에 대한 보고

o 당 중앙위원회 및 중앙검열위원회 선거

801명

2차

당대회

'48.3.27-30

(4일간)

o 당중앙위원회 사업결산 보고

o 당규약 수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

990명

3차

당대회

'56.4.23-29

(7일간)

o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총결 보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채택)

o 당규약 개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

914명

1차

당대표자회

'58.3.3-6

(4일간)

o 인민경제발전 1차 5개년계획(`57~‘61)

o 당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는 문제

o 당조직문제

4차

당대회

'61.9.11-18

(8일간)

o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채택)

o 인민경제발전 7개년계획('61~'67)

o 당규약 수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

1,230명

2차

당대표자회

'66.10.5-12

(8일간)

o 현정세와 당의 과업(국방·경제 병진정책)

o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당면 과업

(인민경제발전 7개년계획 3년 연장)

o 월남문제에 관한 당대표자회 성명 채택

o 당조직문제(당중앙위원장제 폐지 및 총비서 직제로 개편, 선거)

1,323명

5차

당대회

'70.11.2-13

(12일간)

o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o 인민경제발전 6개년계획('71~'76)

o 당규약 개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

1,871명

6차

당대회

'80.10.10-14

(5일간)

o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80년대 10대 경제전망목표 제시, 고려민주 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천명)

o 당규약 개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김정일 당 정치국 상무위원 선출)

3,220명


(출처 -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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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일지(2000-2009)

차수

총 상봉자

남측

북측

차수

총 상봉자

남측

북측

1차

(‘00.8.15~18)

203가족

102

101

2차

(‘00.11.30~12.2)

200가족

100

100

1,172명

853

319

1,222명

868

354

3차

(‘01.2.26~28)

200가족

100

100

4차

(‘02.4.28~5.3)

199가족

99

100

1,242명

899

343

849명

565

284

5차

(‘02.9.13~18)

199가족

99

100

6차

(‘03.2.20~25)

198가족

99

99

875명

554

321

850명

560

290

7차

(‘03.6.27~7.2)

200가족

100

100

8차

(‘03.9.20~25)

200가족

100

100

899명

582

317

942명

596

346

9차

(‘04.3.29~4.3)

200가족

100

100

10차

(‘04.7.11~16)

200가족

100

100

969명

633

336

957명

620

337

11차

(‘05.8.26~31)

198가족

98

100

12차

(‘05.11.5~10)

199가족

99

100

908명

579

329

903명

584

319

13차

(‘06.3.20~25)

199가족

99

100

14차

(‘06.6.19~30)

395가족

197

198

907명

568

339

1,776명

1,110

666

15차

(‘07.5.9~14)

198가족

98

100

16차

(‘07.10.17~22)

190가족

93

97

910명

584

326

831명

518

313

‘09년 추석계기

(‘09.9.26~10.1)

195가족

97

98

888명

554

334

(자료 출처 -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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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2010.9.17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 떠나는 대표단

통일외교국방 2010. 9. 17. 10:14


오늘 개성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 관련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이 열린다. 남측 대표단이 서울을 출발하기에 앞서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대표단이 간단한 입장을 밝힌다고 해서 아침 일찍 취재하러 갔다. 늦잠 자서 결국 봉천동에서 삼청동까지 택시를 탔다. 아! 아까운 택시비.

1년만에 열리는 이산가족 상봉행사라 언론의 관심도 높다. 이날 남북회담본부에는 20-30명의 취재진이, 개성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도라산 출입사무소에는 150명의 취재진이 몰렸다고 한다. 혹시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통해 남북관계가 풀릴 계기를 마련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취재진이 몰리는데 한 몫한 것 같다.

가운데 말학 있는 사람이 남측 수석대표인 김의도 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실행위원이다. 통일부에서 통일정책협력관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정부 대표 성격도 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 일정을 협의하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행사 실무절차를 협의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제발 그러길 빈다.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상봉 숫자 확대 등을 요구하다가 10월 쯤 열릴 예정인 이산가족 상봉행사 마저 뒤틀리는 일은 없길 바란다.

정부가 강조하는대로 이산가족 문제는 시급한 문제다. 남측의 이산가족은 12만명이 넘고 이중, 44,444명이 고령으로 돌아가셨다. 1년에 남북 각각 100명씩 만나도 8만명이면 800년이 걸린다.  

상봉 행사 정례화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상시상봉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때 금강산에 이산가족 면회소를 건립했다. 거기서 남북 이산가족들이 상시로 만날 수 있게 하자는 거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와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다.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상시화를 이루고 싶다면 금강산 관광부터 열어야 한다. 아니면 다른 현실적인 방안을 찾던지. 정부말대로 인도주의 문제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풀어나가자. 정치적인 문제와 연계시키지 말고 대범하게.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인도주의 문제가 전향적인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이산가족 상봉행사 일지- 출처 : 통일부>

차수

총 상봉자

남측

북측

차수

총 상봉자

남측

북측

1차

(‘00.8.15~18)

203가족

102

101

2차

(‘00.11.30~12.2)

200가족

100

100

1,172명

853

319

1,222명

868

354

3차

(‘01.2.26~28)

200가족

100

100

4차

(‘02.4.28~5.3)

199가족

99

100

1,242명

899

343

849명

565

284

5차

(‘02.9.13~18)

199가족

99

100

6차

(‘03.2.20~25)

198가족

99

99

875명

554

321

850명

560

290

7차

(‘03.6.27~7.2)

200가족

100

100

8차

(‘03.9.20~25)

200가족

100

100

899명

582

317

942명

596

346

9차

(‘04.3.29~4.3)

200가족

100

100

10차

(‘04.7.11~16)

200가족

100

100

969명

633

336

957명

620

337

11차

(‘05.8.26~31)

198가족

98

100

12차

(‘05.11.5~10)

199가족

99

100

908명

579

329

903명

584

319

13차

(‘06.3.20~25)

199가족

99

100

14차

(‘06.6.19~30)

395가족

197

198

907명

568

339

1,776명

1,110

666

15차

(‘07.5.9~14)

198가족

98

100

16차

(‘07.10.17~22)

190가족

93

97

910명

584

326

831명

518

313

‘09년 추석계기

(‘09.9.26~10.1)

195가족

97

98

888명

554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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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적 대북지원'? 자기 모순에 빠진 통일부

통일외교국방 2010. 8. 2. 15:24

 '인도적 대북지원'? 자기 모순에 빠진 통일부
2010년 08월 02일 (월) 14:06:20 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통일부가 2일 대북 인도적 지원단체들의 협의체인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의 평양 방문을 불허했다. 5.24 조치가 유효한 시점에서 방북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불허 이유다.

천안함 보복 차원에서 마련된 5.24조치를 통해, 통일부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지구를 제외한 북한 지역에 대한 방북을 불허하고 대북 지원사업은 원칙적으로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단, 영유아 등 취약계층에 대한 순수 인도적 지원은 유지할 것이라는 예외 조항을 달았다.

그러나 통일부는 '취약계층에 대한 순수 인도적 지원을 위한 방북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간과했다. 인도적 지원은 분배투명성 확보를 위해 방북을 수반한다. 지원한 물품이 해당 지역 및 대상에게 배분되는지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눈으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통일부가 대북인도지원 분야에서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분배투명성 강화'다. 통일부는 올해 초 업무계획에서 주요 과제 중 하나로 '단계별 모니터링을 통한 분배 투명성 강화'를 제시하기도 했다.

두 달이 지난 현재 통일부는 '순수 인도적 지원의 분배투명성을 위한 방북 문제'에 대해 원칙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사안별로 방북 목적과 계획, 남북관계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서 판단하겠다"는 방침이 고작이다.

이번 북민협의 방북은 '평양 상주 사무소 설치를 통해 분배투명성 확보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취지였다.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들은 평양에 상주 사무소를 두고 인도적 지원 물자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 체계를 갖추고 있다.

북민협이 방북 신청은 '방북 불허'와 '분배투명성 강화'라는 모순된 정책 사이에서 정부의 결정을 요구했다. '분배투명성을 강조해온 만큼 이를 위한 방북을 허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부는 자신이 그토록 강조했던 분배투명성 강화는 외면하고 방북 불허를 선택했다.

현 남북관계 상황에서 '방북 불허'라는 정책이 더 중요한 원칙이라면 '분배투명성 강화'를 위한 정책은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논리적이지만, 통일부는 여전히 분배투명성 확보를 인도지원사업 승인의 주요한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통일부는 반출계획서를 통해 인도지원 단체들에게 '분배투명성 확보 계획'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 인도지원 단체 관계자는 "분배투명성 확보를 위해 방북할 계획이라고 적는다고 통일부가 방북을 허가해 줄 것인가"라고 혀를 찼다.

이같은 '모순된 행정'은 남북교류와 남북화해를 위해 만들어진 통일부가 남북교류를 끊고 남북 간 불신을 키우는데 앞장서고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존재와 현실이 모순된 상황에서 취하는 모든 행위는 모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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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발표 의문점.. "연어급 잠수정, 중어뢰 장착할 수 있나?"

통일외교국방 2010. 5. 20. 21:39

'연어급' 잠수정, 중어뢰 장착할 수 있나?
천안함 조사발표 의문점.."130톤급 잠수정은 중어뢰 못 실어"
2010년 05월 20일 (목) 21:26:32 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민.군합동조사단은 20일 천안함 조사 발표에서 '연어급 잠수정'이 서해안으로 침투해 천안함에 중(重)어뢰를 발사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군사 전문가들은 '상어급(300톤급)'보다 작은 '연어급(130톤급)' 잠수정이 중어뢰를 장착하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합조단은 이날 천안함 침몰 2-3일 전에 모함인 상어급 잠수함과 연어급 잠수정이 북한 해군기지를 이탈했다가 침몰 2-3일 이후에 기지로 복귀했다고 설명했다.

황원동 합조단 정보본부장은 "사용된 어뢰 종류, 수심 등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연어급 잠수정 1척이 본 도발에 운영됐을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북한 '연어급 잠수정'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재원이다. 이날 합조단은 북한군이 연어급을 포함한 소형 잠수정 10여척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어급 잠수정 재원에 대해 황 본부장은 "대부분 상어급 잠수함과 유사하다"며 "수출형으로 건조됐고 최근에 건조해 야시 장비를 포함한 고성능 장비를 구비하고 은밀성을 높이기 위해 선체를 특별하게 건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 소형 연어급 잠수함이 중어뢰를 싣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날 합조단이 천안함에 사용된 어뢰와 크기와 형태 등 설계도면이 일치했다고 밝힌 북한산 CHT-02D 어뢰는 직경 21인치, 무게 1.7톤으로 폭발장약이 250kg에 달하는 중어뢰다.

한 안보 전문가는 "300톤 이하 잠수정은 경(輕)어뢰 2개 정도를 실을 수 있지만 중어뢰는 못싣는다"며 "1,800톤급은 되어야 폭발장약 250kg 중어뢰를 장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형 잠수정은 250kg 규모의 폭발장약의 발사 반동은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잠수정은 정보탐지용으로 적에게 노출될 때 자위수단으로 경어뢰를 사용한다"며 "중어뢰는 자위, 공격 겸용지지만 잠수정에 쓰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합조단이 천안함 침몰 폭발력과 서해 해저 지형 등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연어급 잠수정'이라는 새 재원을 만들어냈다 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군사 전문가 김종대 D&D FOCUS 편집장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잠수함이 나왔다"면서 "상어급은 너무 커서 연안에 못 들어오고, 잠수정은 중어뢰를 장착하지 못하니까 연어급 잠수함이라는 것으로 짜 맞춰낸 것일 수 있다"고 짚었다.

종합해보면, 시뮬레이션 결과 천안함 침몰에 200-300kg 규모의 폭발이 있었다는 점에서 먼저 무기를 '중어뢰'로 규정해 놓고, 수심이 얕은 서해안에서 운용할 수 있으면서도 중어뢰를 실을 수 있는 새로운 '연어급 잠수함'을 만들어 냈다는 지적이다.

한편, 미국 CBS뉴스가 19일(현지시간) "미국, 영국, 호주 조사단을 모두 조사결과에 지지를 표했으나, 오직 스웨덴 조사단은 북한을 배후로 지목하는 것을 주저했다"고 보도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날 윤덕용 민.군합동조사단장(민간)도 이날 조사발표를 마친 뒤 '스웨덴 측은 북한 공격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스웨덴 측은) 상선을 주로 (조사) 하던 곳이라 그런 것 같다"고 사실상 시인했다.

하지만 박정이 민.군합동조사단장(군)은 이날 조사발표에서 "참석한 외국조사단 모두가 완전하게 일치를 보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견해를 일치하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겠다"고 공식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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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암함 발표조사, 남은 의문점은? '손으로 쓴 1번', '잠수정 침투경로'

통일외교국방 2010. 5. 20. 15:09

천안함 조사발표, 해명과 남은 의문점
'손으로 쓴 1번', '잠수정 침투경로', '공개된 설계도면'?
2010년 05월 20일 (목) 14:30:07 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민.군 합동조사단이 20일 "천안함은 북한제 어뢰에 의한 외부 수중 폭발의 결과로 침몰됐다"고 결론 내렸다.

이날 합조단의 조사발표는 천안함이 어뢰 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집중 부각됐지만, 어뢰와 북한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데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다는 평가다.

어뢰 잔해물, 소개 팜플릿에 나와 있는 '설계도면'?

   
▲ 천안함 침몰원인을 조사해온 민.군 합동조사단이 20일 오전 10시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조사결과를 공식 발표하는 가운데 백령도 사고지역 근해에서 쌍끌이 어선이 수거한 결정적 증거물인 어뢰 추진체와 관련해 윤덕용 공동조사단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합조단은 이날 '결정적 증거물(스모킹 건)'로 지난 15일 쌍끌이 어선이 함미 부근에서 인양한 '어뢰 잔해물'을 제시했다. 이 어뢰 잔해물은 어뢰의 추진 동력부인 프로펠러를 포함한 추진모터와 조종 장치로 이뤄져 있다.

이를 두고 합조단은 "(어뢰 수거물이) 북한이 해외로 수출할 목적으로 배포한 어뢰 소개 자료의 설계도에 명시된 크기와 형태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제시된 북한 어뢰 설계도는 북한산 무기소개책자에 제시되어 있는 CHT-02D 어뢰의 설계도면이라고 합조단은 전했다. 하지만 통상 군사 기밀상 소개 책자에 이같이 무기의 자세한 설계도면을 싣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는 지적이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황원동 합조단 정보본부장은 "어뢰 CHT-02D 팜플릿은 출처 보호 및 기타 보안 사항 때문에 입수 경위를 설명할 수 없다"면서 "팜플릿에 어뢰의 제원, 특성, 설계 도면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해명했다.

일각에서는 이 어뢰 잔해물이 천안함 공격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조류가 빠른 서해안 특성상 북측에서 흘러 내려왔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합조단은 어뢰 잔해에 흡착되어 있는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천안함 함수, 함미, 연돌에 흡착되어 있는 물질과 동일하다며 이같은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 흡착물은 '비결정체 알루미늄 산화물'로, 어뢰의 버블제트 효과를 위해 사용된 알루미늄 분말이 폭발로 인해 산화.냉각된 흔적이라는 것이 합조단의 설명이다.

손으로 쓴 '1번' 한글 표기.. 폭발 후에도 남았다?

   
▲ 백령도 사고지역 근해에서 쌍끌이 어선이 수거한 결정적 증거물인 어뢰 추진체 한 부분에 매직으로 '1번' 이라고 씌여져 있다.[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또 다른 스모킹 건으로 제시된 '1번'이라는 한글표기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더욱 커 보인다.

수거된 어뢰잔해물의 추진부 뒷부분 안쪽에는 파란색 사인펜을 사용해 손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1번'이라는 표기가 뚜렷이 남아 있다.

합조단은 이미 확보하고 있는 북한산 어뢰에 '4번'이라고 쓰인 표기방법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이 번호는 어뢰 부품의 조립이나 정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합조단이 확보하고 있는 북한산 어뢰는 연습용으로 폭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4번'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수중에서 고온.고압으로 폭파된 어뢰 잔해물에 각인된 것도 아닌 사인펜으로 쓴 글자가 남아 있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합조단 조사발표에 앞서 '1번' 한글표기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기자들과 전문가들은 한글표기가 어뢰 철판에 각인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사인펜으로 쓴 표기가 공개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윤종성 합조단 과학수사분과장 "잉크에 대한 분석은 장기간 걸리지만 확인은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즉, 아직 잉크에 대한 분석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북한 잠수정의 침투경로 .. 국방부 말 바꾸기?

천안함에 접근해 어뢰를 쐈다는 북한 잠수정의 침투 경로에 대해서 합조단은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이날 합조단은 연어급 잠수함정 1척이 서해 공해상 외곽으로 우회 침투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이 근거로 서해 북한 해군기지에서 운영되던 소형 잠수함정(연어급)과 이를 지원하는 모선(상어급)이 천안함 공격 2-3일 전에 기지를 이탈했다가 천안함 공격 2-3일 후에 복귀한 점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같은 설명은 당초 국방부의 입장과 상충되는 것이다. 한 달 전 북한 잠수함 침투설이 보도되자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4월 14일 국방위에 출석해 "북한 잠수함 2척 정도가 관측되지 않은 것만 가지고 그 배들이 내려왔다고 입증할 만한 것은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국방부 정보분석 결과가 달라진 추가 정황이 있나'라는 질문에 손기화 정보분석분과장은 "북한군 잠수함정 두 척이 기지를 이탈했고 그것을 식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라면서도 "이 사건으로 인해 특별히 정보 판단이 달라질 것은 없다"고 시인했다.

즉 북한 잠수정의 침투경로는 단순 추정일 뿐이다. 국방부가 천안함 원인의 주체로 북한을 지목하면서 침투경로도 이에 끼어 맞췄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침투경로 뿐만 아니라 도주경로를 묻는 질문에 대해 황원동 합조단 정보본부장은 "도주 경로는 도발한 이후 신속히 현장을 이탈해 침투한 경로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인다"라는 답변 밖에 하지 못했다.

그는 "수중 잠항이 시작되면 현재 어느 나라의 기술로도 분명하게 추적하는 것은 제한적인 것이 현실"이라며 "이번 사태 시에 기지를 이탈하는 것을 식별했지만 우리 해역까지 침투해 도발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라며 잠수함에 대한 부족한 정보수집 능력을 시인했다.

어뢰 폭발 각종 증거 제시... 물기둥은 설득력 부족

이날 합조단은 많은 근거를 제시해 천안함 침몰 원인으로 '어뢰 폭발'로 결론지었지만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띈다.

합조단이 어뢰 폭발의 근거로 제시한 점은 함체의 변형된 모습, 선저 부분 수압 및 버블 흔적, 열 흔적이 없는 전선의 절단, 초병의 물기둥 목격 진술, 사체검안 결과 등이다.

이 중 함체 변형이나 선저 버블 흔적은 비결정체 알루미늄 산화물 흔적과 함께 어뢰 폭발 가능성에 무게를 주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어뢰 수중 폭발 시 발생하는 물기둥에 대한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생존자 중 충격으로 쓰러진 좌현 견시병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는 진술과, 탈출 당시 물웅덩이에 발이 빠졌다는 진술은 100미터 높이로 치솟는 물기둥 대한 근거로 미약해 보인다.

특히 백령도 해안 초병이 2-3초 간 높이 약 100미터 백색 섬광 기둥을 관측했다는 진술 내용도 여러 번 번복된 바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합조단의 이날 조사결과 발표에 근거해 대북 제재조치 등을 내놓을 예정이지만 조사결과에 대한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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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제재' 최일선에 나선 통일부... "공포분위기 조성"

통일외교국방 2010. 5. 17. 22:59
정부 北제재, 교류협력 전면 위축 우려
'제재조치' 최일선에 나선 통일부.. "공포분위기 조성"
2010년 05월 17일 (월) 18:48:17 정명진.조정훈.고성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통일부가 대북제재 조치에 앞서 사전 정지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주 통일부는 남북경협업체들에게 신규계약 자제와 원부자재 대북 반출 보류 방침을 통지했으며, 각 정부 부처에 공문을 보내 대북사업을 잠정 보류할 것을 요청했다.

정부는 실질적인 대북제제 조치는 천안함 조사결과가 발표되는 20일 이후 취할 계획이다. 지난 4월 북한의 금강산 관광 지구 내 남측 부동산 몰수.동결 조치에 대한 통일부의 대북조치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제제 조치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이날 "실질적인 조치는 20일 근방에서 갈(취할) 것"이라며 "천안함 사건 발표 때 한꺼번에 정리되지 않겠나. 금강산 부동산 동결 관련 대응책도 6월 전에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통일부의 행정적 조치로 대북 제재가 이미 시작됐다는 평가다. 통일부가 업체들에게 경협에 대한 방침을 통지한 지난 11일 이후 위탁가공업체의 원부자재 물자 반출은 단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통일부가 대북제제 조치에 따른 남측 업체들의 피해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 민간업체가 스스로 사업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대북경협업체 관계자는 "통일부로부터 신규 계약을 하지 말아달라는 직접 전화를 받았는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강조하면서 하던 일을 빨리 마무리 하라고 했다"며 "자기들이 막겠다는 말은 안 해도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의 대북제재 조치가 당국의 대북사업 뿐만 아니라 민간 경협 사업 및 대북사업까지 포함하고 있어 남북교류협력의 전면적인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특히, 이번 정부의 제재조치가 북한의 반발을 불러 개성공단에 대한 제한 및 폐쇄조치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 경우 남북관계 자체가 전면적으로 차단될 위험이 크다.

개성공단 입주 업체 관계자들은 최근 남북관계에 개성공단이 연루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언론 접촉 자체도 피하고 있다. 다만 정부가 개성공단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기 보다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다루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대북인도적 지원단체들은 '취약계층에 대한 대북 인도적 사업을 유지한다'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 일단 지켜보겠다는 분위기지만 인도적 지원 사업 위축에 대한 우려는 마찬가지다.

한 인도지원단체 관계자는 "현 장관이 인도적 지원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될 지 지켜봐야 겠다"라면서 "지금 관심사는 천안함 공식 발표 이후에도 대북제재 조치를 할 때 인도적 지원 물자반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박현석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민간이 북한을 도와주는 것을 중단하는 것은 파국으로 몰아가자는 것"이라며 "마지막 보루인 민간단체의 인도적 지원까지 막으면 국민들도 크게 (반발하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통일부가 대북제제의 최일선에 나서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 되고 있다. 이후 남북관계 개선 국면이 열릴 경우 대북 협상의 주무부처인 통일부의 입지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대북제재를 하더라도 예전의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차원에서 진행해야 한다"며 "통일부 명의로 대북제재를 할 경우 차후 남북관계에 복귀할 때 명분이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최후에 움직여야 하는 통일부가 앞서 가고 있다"며 "교류협력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부처가 교류협력을 제한하는 것은 통일부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안보 강화를 통해 평화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냉전.대결시대의 통일부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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