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조선중앙통신, 2010.09.29>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김영남  

주체17(1928)년 2월 4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출생. 대학졸업후 중앙당학교 교원,당중앙위원회 부부장,외무성 부상,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부장,비서,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을 거쳐 주체87(1998)년 9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최영림   

주체19(1930)년 11월 20일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7월 인민군대 입대. 대학졸업후 경제기사의 자격 받음. 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부부장, 제1부부장, 부장, 금수산의사당 서기실 책임서기, 정무원 부총리, 중앙검찰소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평양시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6월부터 내각총리로 사업.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조명록

주체17(1928)년 7월 12일 함경북도 연사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12월 인민군대 입대. 항공학교졸업후 대대장,련대장,사단장,공군사령부 참모장,사령관,총정치국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2월부터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리영호   

주체31(1942)년 10월 5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출생. 주체48(1959)년 8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졸업후 사단 참모장,군단 작전부장,훈련소 참모장,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부총참모장, 훈련소 소장을 거쳐 주체 98(2009)년 2월부터 총참모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김영춘  

주체25(1936)년 3월 4일 량강도 보천군에서 출생. 주체45(1956)년 7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졸업후 군단 작전부 부부장,총참모부 정찰국 참모장, 국장, 부총참모장 겸 작전국장,훈련소 소장,군수동원총국장,군단사령관,총참모장,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2월부터 인민무력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전병호   

주체15(1926)년 3월 20일 자강도 전천군에서 출생. 주체34(1945)년 10월 적위대 입대. 대학졸업후 금속공학주물기사의 자격 받음. 26호공장 부기사장, 국가계획위원회 부장,강계뜨락또르공장 기사장,당중앙위원회  부부장, 부장, 제2경제위원회 부위원장,1부위원장 겸 당책임비서,위원장,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내각 정치국 국장,당책임비서로 사업.

정치국 위원 김국태  

주체13(1924)년 8월 27일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출생. 고급당학교 졸업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부부장,부장,인민군총정치국 부국장, 사회안전성 정치국장,김일성고급당학교 교장,당중앙위원회 부장,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김기남  

주체18(1929)년 8월 28일 함경남도 금야군에서 출생.대학졸업후 경제전문가의 자격 받음. 김일성종합대학 교원,학부장,당중앙위원회 부부장,로동신문사 책임주필,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부장,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5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최태복  

주체19(1930)년 12월 1일 남포시 항구구역에서 출생. 대학졸업후 김책공업대학 교원,학부장,학장,교육위원회 위원장 겸 고등교육부장을 거쳐 주체75(1986)년 12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사업.

정치국 위원 양형섭   

주체14(1925)년 10월 1일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강구역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6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중앙당학교 교장,고등교육상, 당중앙위원회 비서,사회과학원 원장,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을 거쳐 주체87(1998)년 9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강석주   

주체28(1939)년 8월 29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 대학졸업후 외무성 지도원,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외교부 부부장,외무성 제1부상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내각부총리로 사업.

정치국 위원 변영립  

주체18(1929)년 9월 20일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9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물리전문가의 자격 받음. 김일성종합대학 강좌장,고등교육성 국장,교육위원회 1부부장,국가과학원 부원장 ,교육상,국가과학원 원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7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리용무   

주체14 (1925)년 1월 25일 평안남도 평성시에서 출생. 주체36(1947)년 6월 중앙경위대대 입대. 제2중앙정치학교졸업후 총정치국 지도원,사단 정치부장,사단장,총정치국 조직부장,조직부국장,제1부국장,총정치국장,국가검열위원장,사회안전부 정치국장,교통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국장을 거쳐 주체87(1998)년 9월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주상성   

주체22(1933)년 8월 1일 강원도 문천시에서 출생. 주체40(1951)년 6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대학졸업후 군단 작전상급참모,려단장,사단장,지구사령부 참모장,군단사령관,총참모부 검열관을 거쳐 주체93(2004)년 7월부터 인민보안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위원 홍석형   

주체25(1936)년 10월 1일 서울시에서 출생. 대학졸업후 금속공학기사의 자격 받음. 성진제강소 기술부기사장,금속공업부 제1부부장,김책제철련합기업소 기사장, 함북도당 제2비서 겸 김책제철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국가계획위원장,함북도당 책임비서, 당중앙위원회 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계획재정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리태남   

주체27(1938)년 3월 26일 평안북도 염주군에서 출생. 평양기계대학졸업후 금속가공기사의 자격 받음.  탄광기계공장 직장장, 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과장,과장,강선제강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남포시행정경제위원장,황해제철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도당책임비서를 거쳐주체99(2010)년 6월부터 내각부총리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락희  

주체22(1933)년 11월 11일 평안남도 개천시에서 출생. 인민경제대학 졸업후 협동농장관리위원장,군협동농장경영위원장,도농촌경리위원장, 당중앙위원회 부부장,황남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6월부터 내각 부총리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태종수   

주체25(1936)년 3월 20일 함경북도 명간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9월 인민군대 입대. 대학졸업후 기계제작기사의 자격 받음. 보통교육성 교학,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도당비서,기계공장 지배인, 선박공업부장,대안중기계련합기업소 당책임비서,내각부총리,함남도당 책임비서,당중앙위원회 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총무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평해  

주체30(1941)년 10월 8일 자강도 전천군에서 출생. 주체49(1960)년 2월 인민군대 입대. 사범대학졸업후 도당 지도원,과장,부부장,당중앙위원회 지도원,도당 부장,조직비서,평북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간부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우동측   

주체31(1942)년 8월 8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철학전문가의 자격받음.  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과장,국가안전보위부 국장,부부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9월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정각  

주체30(1941)년 7월 20일 평안남도 증산군에서 출생. 주체48(1959)년 8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졸업후 대대장,군단 부사령관,훈련소 참모장,소장,인민무력부 부부장을 거쳐 주체96(2007)년 3월부터 총정치국 제1부국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박정순   

주체17(1928)년 7월 1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7월 인민군대 입대. 중앙당학교졸업후 군당부부장,도당지도원,당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함남도당 제2비서,당중앙위원회 과장,부부장,평양시당 조직비서,당중앙위원회 부부장,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창섭  

주체35(1946)년 1월 2일 평안남도 은산군에서 출생. 주체52(1963)년 7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고급당학교졸업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책임지도원,부과장,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정치국 부국장을 거쳐 주체98(2009)년 8월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정치국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문경덕   

주체46(1957)년 10월 12일 평양시 대성구역에서 출생. 주체62(1973)년 10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정치경제학전문가의 자격 받음. 평양시당 지도원,사로청중앙위원회 부위원장,2호지도국장,당중앙위원회 부부장,평양시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평양시당 책임비서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양건  

주체31(1942)년 4월 24일 평안남도 안주시에서 출생. 주체48(1959)년 8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프랑스어 및 문학전문가의 자격 받음. 사로청중앙위원회 지도원,당중앙위원회 지도원,과장,부부장,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김영일  

주체36(1947)년 3월 17일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출생. 국제관계대학졸업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외무성 국장,부상,당중앙위원회 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국제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박도춘   

주체33(1944)년 3월 9일 자강도 랑림군에서 출생. 주체49(1960)년 10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고급당학교졸업후 광산당비서,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과장,과장,도당 비서 겸 부장,자강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최룡해
주체39(1950)년 1월 15일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출생. 주체56(1967)년 9월 인민군대 입대.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정치경제학전문가의 자격 받음. 사로청중앙위원회 부부장,부장,부위원장,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1비서,당중앙위원회 부부장,황북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장성택   

주체35(1946)년 1월 22일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에서 출생. 김일성종합대학졸업후 평양시당 지도원,당중앙위원회 지도원,부과장,과장,부부장,제1부부장,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6월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 사업.

정치국 후보위원 주규창   

주체17(1928)년 11월 25일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 주체39(1950)년 3월 인민군대 입대. 대학졸업후 기계공학기사의 자격 받음. 국방과학원 부원장,제1부원장,원장,당중앙위원회 부부장,제2경제위원회 위원장,제2자연과학원 원장,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거쳐 주체99(2010)년 9월부터 당중앙위원회 기계공업부장으로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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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3남 김정은의 성장과정, 자질과 후계자 결정 배경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은의 성장과정에 대해 현재 해외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은 1988년부터 1996년까지, 그리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김정일의 요리사로 11년간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임.

- 그는 북한의 당과 군대, 국가의 고위간부들이 참석하는 연회뿐만 아니라 김정일 가족의 생일파티를 준비하였고, 김정일의 바캉스에도 동행함으로써 김정은의 개인적 신상정보와 자질, 위상 등에 대해 잘 알게 됐음.

- 그래서 필자는 2008년 12월 일본을 방문하여 후지모토 겐지와 장시간 북한의 주요 엘리트와 김정은의 위상 등에 대해 심층적인 인터뷰를 진행하였음.

- 아래에 소개하는 김정은의 성장과정은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 『김정일의 요리사』, 필자의 그와의 인터뷰, 그리고 기타 자료 등을 참고해 정리한 것임.

   

1) 김정은의 성장 과정과 자질

 

○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은 고영희와 김정일 사이에서 1983년 1월 8일에 태어났음.

- 김정일은 고영희를 1975년경에 만나 1976년경부터 동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일본과 남한의 일부 연구자들은 고영희가 북한 유도의 창시자인 고태문의 딸이라고 주장해왔으나, 남한 정보당국은 고영희가 1999년 사망한 재일동포 고경택의 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

- 김정은에게는 김정철이라는 친형과 김여정(또는 김일순)이라는 여동생이 있음.

- 김정철은 1980년생이고, 김여정은 1987년생이다.

 

○ 필자는 그동안 여러 논문에서 군주제 국가에서 군주의 생일이 가장 중요한 명절인 것처럼,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이 ‘최대명절’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음.

- 그리고 북한이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후계자 결정이 1974년 그의 생일 바로 3일전인 2월 13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고, 김정일의 아들 중 하나가 후계자로 결정되는 것도 그의 생일을 전후하여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왔음.

- 필자가 예상했던 바와 같이 김정은은 바로 그의 생일 날 김정일의 후계자로 결정되었음.

 

○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김정은을 처음 만난 곳은 신천초대소였는데, 그 때 김정은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함.

- 이는 김정일이 아들들을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키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함.

 

○ 김정은은 후지모토 겐지를 처음 만나 악수할 때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았음.

- 후지모토 겐지는 ‘이 녀석은 증오스러운 일본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듯한 김정은의 당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수기에 적었음.

- 김정은이 어려서부터 대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임.

 

○ 김정은의 이 같은 면모는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김정일이 그를 통이 크게 키운데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을 것임.

-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음식이라면 술도 마시게 했고, 7세부터 초대소 안에서 벤츠600형을 운전하게 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에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작은 왕자 정은”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수기에 ‘초등학생’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잘못 쓰여진 것이라고 밝혔음.

- 그에 의하면 김정철과 김정은은 북한에서 정식으로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며, 장성택이 이들의 교육 문제를 담당했음.

- 장성택은 고모부로서 김정철 및 김정은의 성장과정에 밀접하게 관여한 셈임.

 

○ 북한에는 ‘초대소’라고 불리는 호화 별장이 곳곳에 있는데, 그 중 평양 근처에 위치한 강동(별칭 ‘32호’)초대소에는 김정일 전용의 ‘장군 건물’, 고영희와 그녀의 자녀들을 위한 ‘1호 건물’,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와 남편 장성택(현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부부를 위한 ‘2호 건물’, 그리고 초대소 내부를 총괄하는 ‘본관 건물’이 있음.

- 초대소의 이 같은 구성은 외부세계에서 김정남의 ‘후원자’로 간주되는 장성택이 실상은 고모부로서 김정은과 가깝게 지냈음을 보여줌.

- 후지모토 겐지는 바로 이 강동초대소에서 김정철, 김정은에게 당구를 가르쳤고, 그 후 이들은 줄곧 당구를 즐긴 것으로 보임.

 

○ 김정은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그가 12세 때 여동생이 그에 대해 ‘작은 오빠’라고 부르자 화를 냈다는 일화에서도 나타남.

- 그 사건 이후 후지모토 겐지는 정철에게 ‘큰 대장동지’라고 부르고, 정은에게는 ‘작은’을 빼고 ‘대장동지’라고 불렀다고 함.

- 이처럼 정은은 상당히 기가 셌음.

- 그는 스포츠에도 만능이며, 김정일처럼 영화도 좋아했다고 함.

- 2009년 1월 8일 후계자 결정 이후 김정은은 북한에서 ‘김대장’ 또는 ‘청년대장’으로 불려왔는데,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을 통해 이미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대장’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음.

 

○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이 김정은을 편애하고 있음이 가족의 식사자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술회하고 있음.

- 식탁에서 김정일이 가운데 앉고, 그 왼쪽에 부인 고영희가 앉았으며, 김정은은 고영희 왼쪽에 앉았음.

- 그리고 딸 김여정이 김정일 오른편에 앉았고, 김정철은 김여정의 오른쪽에 앉았음.

- 그래서 부인 고영희가 빠질 경우 김정은은 김정일 바로 옆자리에 앉았지만, 김정철은 늘 김정일 옆에 앉지 못했다는 것임.

 

2)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 국내외에서 알려진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에 대한 정보 중엔 부정확한 것이 많음.

- 스위스의 프랑스어 시사주간지 렙도(L'Hebdo)는 2009년 3월 5일자 기사에서 김정은이 베른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Berne)를 ‘박철(Pak Chol)’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고 보도했음.

- L'Hebdo의 이 같은 보도를 국내외의 많은 언론들은 무비판적으로 소개했는데, 베른국제학교를 ‘박철’이라는 가명으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다닌 것은 3남 김정은이 아니라 차남 김정철임.

 

○ 김정철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베른에 유학한 사실은 이미 2006년에 국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일본인 오오노 가즈모토(大野和基)씨의 스위스 현지 취재에 의해 밝혀진바 있고, 국내의 한 월간지를 통해서 상세히 소개된 바 있음.

- 필자도 김정철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2008년 8월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김정철의 베른국제학교 재학 시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음.

 

○ ‘박철(Pak Chol)’이라는 가명에서 ‘박’은 1998년 5월까지 스위스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의 망명한 외교관인 이모부 박건(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의 남편)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철’은 김정철의 이름 끝 글자에서 따온 것임.

- 공교롭게도 후지모토 겐지의 북한 이름도 박철이었음.

- 그래서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철이 자신을 좋아해서 베른국제학교에서 ‘박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와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음.

- L'Hebdo는 또한 ‘박철’의 성격에 대해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3남 김정은의 성격이 아니라 차남 김정철의 성격임.

 

○ 2009년 6월 14일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 보도에 의하면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가 아니라 자택 인근의 공립중학교를 ‘박운(Pak Un)’이라는 가명으로 다녔음.

- ‘박운(은)’이라는 가명에서 ‘박’은 스위스 외교관인 이모부 박건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운(은)’은 김정은의 이름 끝 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임.

 

<사진> 마이니치신문이 공개한 김정은의 스위스 베른중학교 시절 16세의 모습

 

○ 필자는 잘 아는 사이인 일본 주간 겐다이(週刊現代)의 콘도 다이스케 부편집장에게 마이니치신문의 보도 직후 전화를 해서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해 공개한 김정은의 16세 때 사진의 진위여부에 대해 후지모토 겐지의 견해를 물어보게 하였음.

- 그랬더니 후지모토 겐지는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한 사진이 “100%” 맞고, “그 사진을 보면서 과거에 김정은과 같이 놀았던 시절이 생각났다”고 대답했다고 함.

 

○ 김정은은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베른에 체류했음.

- 처음에 1년간 외국어교육학생반에 있다가 6학년 때 정규반으로 옮겼으며, 그후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서 7학년과 8학년을 이수하고 고등학교 단계인 9학년에도 일정 기간 재학하다가 2000년 말에 학교를 그만 뒀음

 

○ 김정운이 다녔던 베른의 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측은 “북한 외교관 자녀의 신분으로 1998년 8월부터 2000년 가을까지 북한 출신의 한 학생이 재학했다”고 2009년 6월 15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음.

- 이 기자회견에서 베른 칸톤(州) 쾨니츠 게마인데(區)의 윌리 슈투더 구청장은 “이 학생은 잘 어울렸으며 부지런하고 야심에 차 있었다”면서 “그의 취미는 농구”라고 말했음.

- 김정은이 다녔던 학교의 현재 교장이자 당시 수학 교사였던 페타 부리(52)씨는 김정은에 대해 “나는 그 학생을 기억하지만 직접 가르친 적은 없다”고 말하고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그 학생이 잘 어울리고, 부지런하고, 야심 찬 학생이었다는 것 뿐”이라고 덧붙였음.

 

○ 김정은은 농구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는 친형인 김정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됨.

- 스위스 유학시절 김정철은 특히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로 7년 연속 리바운드 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데니스 로드맨을 좋아했으며, 언제나 로드맨의 등번호가 새겨진 시카고 불스 티셔츠를 입고 농구를 했음.

- 후지모토는 1996년에 일본에 귀국했다가 1998년 북한에 돌아와서는 과거 김정철과 김정은이 사용하던 체육관이 멋진 농구 코트로 변했으며 각종 기구도 미 NBA에서 쓰는 것과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됨.

- 오랜만에 김정철과 김정은을 다시 보게 된 후지모토 겐지는 “2년 사이에 두 사람 다 몰라볼 정도로 키가 자랐으며 근육도 붙어 있었다”고 회고했음.

 

○ 김정은은 어려서부터 강한 승부욕과 리더십을 보여 왔음.

- 반면 그의 형 김정철은 어렸을 때부터 화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야망이 없기 때문에 북한을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말했음.

- 정철팀과 정은팀이 농구시합을 한 후 정철은 팀원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데 비해 정은은 오랜 시간 반성회를 가졌음.

- 김정은은 팀원들에게 “네가 왜 그쪽으로 패스했느냐? 더 연습하라!”고 지시했다고 함.

- 그의 승부욕과 보스 기질을 확인해주는 대목임.

 

○ 김정은에게는 강한 면만 있는 것이라 아니라 사람을 감동시키는 세심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임.

- 2000년 7월 김정일 일가와 백두산에 올랐을 때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과 안개 속에서 나란히 소변을 보게 되었음.

- 그 때 후지모토 겐지가 그에게 “혹시 내 것 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보이지 않았다고 대답한 그 마음 씀씀이에 후지모토 겐지는 감동했다고 회고하고 있음.

 

○ 또한 백두산에서 마실 맥주가 떨어져 무심코 김정은에게 이야기했더니 며칠 후 밤에 그가 후지모토 겐지의 방으로 찾아와 양쪽 바지 주머니에서 하이네켄 맥주를 두 병 꺼내면서 마시라고 내밀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는 그 때를 기억하며 김정은의 “그런 따뜻한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했다”고 수기에 적었음.

 

○ 장성택과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 간의 관계는 적어도 2003년 황장엽 전 비서가 한국 국회에서 개최된 토론회에서 김정일 이후 장성택이 차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함으로써 이후 장성택이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직무정지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것으로 보임.

- 1990년대 중반 김정일 패밀리가 식사하는 자리에서 김정일과 장성택이 싸운 적이 있었음.

- 이 때 장성택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김정일은 냅킨을 던지려 했고, 이를 고영희가 말렸음.

- 그 때 상황이 매우 심각했는데, 고영희는 장성택의 편이 되어 주었고, 당시 고영희와 장성택 간의 사이는 좋았다고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설명했음.

 

3)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와 장성택의 직무정지

 

○ 후지모토 겐지는 1992년 김정일이 부인 고영희 및 비서와 함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용 팩스 용지를 하나씩 검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수기에서 적고 있음.

- 이는 김일성이 사망하는 1994년 이전에 이미 김정일이 고영희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함.

 

○ 1990년대 말부터 고영희에 대해 북한 군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개인숭배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김정은의 북한 지도부 내 입지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하였음.

- 1998년경부터 북한군 특수부대인 민사행정경찰을 중심으로 시작된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는 2002년에 절정에 도달하였음.

- 북한 내부자료에서 고영희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동지와 꼭 같으신 분,” “인민군 장병들을 충성과 위훈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자애로운 스승” 등으로 치켜세워졌음.

- 이처럼 고영희가 북한 내부에서 ‘국모(國母)’로 내세워짐으로써 그와 김정일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김정철 또는 3남 김정은이 김정일과 성혜림 간에 태어난 ‘장남’ 김정남보다 후계자로 지명받기에 더욱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음.

 

○ 1998년에 미국에 망명한 고영숙과 그녀의 남편 박건은 고영희가 1990년대 초부터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대남 비서를 자기 측근으로 만들어 김정철, 김정은 형제의 후계자 옹립을 준비해왔다고 미 정보당국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김용순 대남 비서는 2000년에만 해도 김국태 비서와 함께 김정일 총비서의 각종 공개 활동을 각각 37회 수행하는 등 김 총비서의 최측근 인사였음.

- 고영숙은 또한 김용순 비서와 고영희가 특히 2001년 김정남이 일본 밀입국을 기도하다 적발돼 추방된 후 북한에 귀환하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인 후계자 옹립작업에 들어갔다고 주장했음.

- 고영숙의 진술이 어디까지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김용순 대남 비서가 음주운전으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 2003년 6월 16일이 고영희 생일이라는 점은 김 비서가 고영희 생일파티에 참석하고 돌아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함.

- 김용순 비서가 동년 10월 26일 사망함으로써 고영희는 중요한 측근 한 명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이후 리제강과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을 통해 김정철 또는 김정은의 후계자 옹립을 추진한 것으로 판단됨.

 

○ 고영희의 부상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중반 권력엘리트의 부침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됨.

- 고영희는 김일성 사후인 1995년경부터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에 동행하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2002년 시점에는 확고하게 제2인자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음.

- 이 같은 상황에서 2003년 7월 4일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가 한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탈북자․북한인권 문제 토론회’에 참석하여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고 지적하고, 장성택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고 발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음.

- 황장엽의 이 같은 발언은 김정철 또는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세우려던 고영희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음이 틀림없음.

- 그 결과 2003년 7월 이후 장성택의 공식 활동이 갑자기 중단되었으며 2004년에는 직무 정지되기에 이르렀음.

- 이는 고영희와 리제강, 리용철 등 그의 측근들이 한국 국회에서의 황장엽 발언을 빌미로 장성택을 김정일의 권력을 넘보는 ‘야심가’로 몰아 무력화시킨 결과로 해석되고 있음.

 

○ 고영희는 2004년 5월 26일 프랑스에서 유선암으로 사망하여 6월초에 북한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확인됨.

- 고영희의 사망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동년 8월 말이었음.

- 이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고영희 사망으로 인해 기존의 후계구도에 변화가 발생하였다는 주장들이 제기됐음.

- 물론 고영희의 사망으로 김정철과 김정은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 중 한명을 상실하게 되었음.

- 하지만 절대권력자 김정일의 마음이 김정남보다 여전히 그들에게 기울어져 있으므로 기존의 후계구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은 것이었음.

 

4) 김정은으로의 후계자 내정과 북한 엘리트들의 입장

 

○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는 북한사회에서 김정은은 단순히 김정일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의 아들이 아니라 ‘왕자’로서 성장했음.

- 사람들은 김정은을 ‘왕자님’이라고 불렀고, 김정은은 자신보다 나이가 31세나 더 많고 김정일의 스케줄을 관리했던 서기 김옥(김정일의 현 동거인)에게 ‘이모’나 ‘김옥 동지’도 아니고 그냥 ‘옥이’라고 불렀음.

- 이 같은 사실은 김정은이 어려서부터 특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함.

 

○ 김정은이 18세 때에 후지모토 겐지에게 “나는 매일 제트스키를 타고, 해양스포츠를 하고, 롤러블레이드․승마를 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은 어떻게 하고 있나?”라고 물은 적이 있음.

- 이 때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이 18세의 나이에 벌써 일반 사람들의 생활을 궁금해 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음.

 

○ 김정은은 원산, 신천, 평양 등 전국에 있는 초대소를 돌면서 자연스럽게 당과 군대 간부들을 만나 이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웠음.

- 후지모토 겐지는 이들 간부들도 자연스럽게 3대 세습을 통한 후계 계승을 생각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

 

○ 앞에서 김정일이 김정은을 편애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음.

- 후지모토 겐지는 고영희도 간부들과의 식사에서 김정철보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필자에게 말했음.

- 후지모토 겐지는 또한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면, 장성택이 100% 지원할 것이라고 내다봤음.

- 또한 김정일의 현부인인 김옥도 성격이 착한 사람으로서 야망을 갖기보다 김정은을 지원할 것이라고 전망했음.

- 이처럼 김정일 패밀리에서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임.

 

○ 결국은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되었지만, 2000년대 상반기까지만 해도 차남 김정철이 후계자로 결정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2003년 12월 말경,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책임일군들 앞에서 내년(2004)은 “내가 김일성 주석의 위업을 이어 간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나간 10년은 우리에게 간고하였지만 우리의 선군 령도가 천만번 지당한지 알게 해 주었다”고 말하면서 김정철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음.

- 그는 그 자리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이 백전백승의 력사와 전통을 이어 위대한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위업을 끝없이 빛내어 나가야 할 신성한 임무가 나서고 있다. 이를 위하여 자신처럼 김정철을 잘 받들어 보좌할 것”을 지시하였음.

- 당시 김정철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간부부 과장으로 막 승진하여 중앙당 내부에서 사업하고 있었음.

- 그러나 그 후 김정철이 김정일의 뒤를 이을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함에 따라 김정일의 마음이 3남 김정은에게로 기운 것으로 파악되고 있음.

 

○ 김정일은 자신을 닮아 적극적인 성격의 김정은을 더 좋아했음.

- 그래서 한 번은 식사 후 두 아들이 농구장으로 나가자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정철은 마음이 여려서 안 된다. 정운은 나하고 닮았다”고 말했다고 함.

-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김정은은 김정일의 얼굴을 쏙 빼닮았으며 체형까지도 흡사함.

- 아들들을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키우고자 어려서부터 군복을 입혔던 김정일이 김정철에 대해 “마음이 여려서 안 된다”는 평가를 굳히게 되었다면, 그의 마음이 대담한 성격의 3남 김정은에게 더 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임.

 

○ 한국의 정보 관련 기관들은 이미 2006년 초부터 “대북 소식통의 정보를 감안할 때 김 위원장에게서 가장 많은 총애를 받고 있고 자질과 리더십에서 우수한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기 시작했음.

- 그처럼 김정일이 김정은을 총애하고 있는 상황에서 2006년 6월 3~7일 김정철이 프랑크푸르트 등 4개 도시에서 개최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것이 일본 후지TV를 통해 보도됨으로써 당 지도부에서 김정철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됨.

- 주민들은 모두 경제난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데 지도자의 아들이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를 돌아다닌다는 것에 대해 지도부 내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짐.

 

김정은이 친형 김정철 대신 후계자로 내정된 시점은 2006년 말경인 것으로 판단됨.

-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에서 2001년에 귀국한 후 2002년부터 2006년 12월까지 군 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군사학을 공부했음.

- 북한 군대에서 2009년 5~6월경 작성되어 배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외비 문건인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이하 「위대성 교양자료」로 약칭)는 “의미 깊은 2006년 12월 24일,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증서와 기장이 기여된 자리에서 주체의 선군혁명위업을 빛나게 이으실 것을 바라시었다”고 언급하고 있음.

- 북한이 김정은의 졸업식 날과 ‘주체의 선군혁명위업 계승’ 의지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이때가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임.

 

○ 「위대성 교양자료」는 2006년 12월 24일 인민군 지휘성원 모두가 김정은이 북한에서 최초로 인공위성 자료와 GPS수신기 좌표를 이용해 만든 작전지도를 보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군사전략사상이 빛나게 구현된 기상천외하고 천별만화하는 만점 계획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 이 문건은 또한 김정일도 이 작전지도를 보고 “작전계획이 아주 창조적이고 착상이 기발하여 1~2번 감복한 것이 아니라고 의미 있게 말씀하셨다”고 언급하고 있음.

- 북한의 일반 대학생이 인공위성 자료와 GPS 수신기 좌표를 가지고 작전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임.

- 김정은이 이처럼 첨단정보를 가지고 작전지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김정일의 아들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임.

- 그리고 김정은이 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그가 김정일에게 인정받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수완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임.

- 북한군 내부 자료는 또한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시절에 보병지휘관 3년제와 연구원 2년제를 전과목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김정일이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에서 대학이 김정일의 3남에게 그보다 낮은 성적을 줄 수는 없었을 것으로 판단됨.

 

김정은이 태어난 평북 창성의 고영희 관저는 김정은의 ‘혁명역사’를 칭송하기 위한 사적지로 지정되어 2007년 3월부터 2009년 1월까지 2년여에 걸쳐 극비리에 확장 개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

- 김정일의 백두산 밀영 집과 같이 주민들에게 나중에 ‘혁명의 성지’로 교양하기 위한 김정은 고향집 사적지는 김정일의 명령으로 당중앙위원회 역사연구소의 지도하에 북한군 제1여단 연대의 특별건설대에 의해 완공되었다고 함.

- 이 같은 사실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사업이 적어도 2007년 3월 이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임.

 

김정은의 북한사회 전반에 대한 정책적 지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분야 등의 40~50대 최고 실력자들로 구성된 실무팀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은 2009년 초부터이지만, 이 실무팀이 구성된 것은 2007년임.

- 이 같은 사실도 2006년 말 또는 2007년 초에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임.

 

고영희 생존 시에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에 자주 동행했던 김정은은 2004년 고영희 사망 후 한동안 동행을 중단했다가 2007년부터는 다시 김정일의 공식활동에 동행하기 시작했음.

- 이처럼 김정은은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된 상태에서 후계수업을 받다가 2008년 여름 김정일이 뇌혈관계 이상으로 쓰러짐으로써 단기간에 후계자로 결정된 것으로 판단됨.

 

 

 



 

정 성 장(鄭成長), 정치학 박사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 수석연구위원,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정책위원장

우) 461-370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대왕판교로 400

세종연구소

TEL: (+82-31)750-7542 / FAX:(+82-31)723-6508

MOBILE: 010-5277-7969

E-mail: davidcheong@chol.com; sccheong@sejong.org   

 

CHEONG, Seong-Chang

Senior Fellow

Inter-Korean Relations Studies Program

The Sejong Institute

400 Daewang Pangyo-ro Sujeong-gu, Seongnam, Kyeonggi Province

461-370,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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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당대회 및 당대표자회 개최 현황

차 수

개최일

의제

참가 대표수

1차

당대회

'46.8.28-30

(3일간)

o 당 창립에 대한 보고

o 당 강령·규약·기관지에 대한 보고

o 당 중앙위원회 및 중앙검열위원회 선거

801명

2차

당대회

'48.3.27-30

(4일간)

o 당중앙위원회 사업결산 보고

o 당규약 수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

990명

3차

당대회

'56.4.23-29

(7일간)

o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총결 보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채택)

o 당규약 개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

914명

1차

당대표자회

'58.3.3-6

(4일간)

o 인민경제발전 1차 5개년계획(`57~‘61)

o 당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는 문제

o 당조직문제

4차

당대회

'61.9.11-18

(8일간)

o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채택)

o 인민경제발전 7개년계획('61~'67)

o 당규약 수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

1,230명

2차

당대표자회

'66.10.5-12

(8일간)

o 현정세와 당의 과업(국방·경제 병진정책)

o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당면 과업

(인민경제발전 7개년계획 3년 연장)

o 월남문제에 관한 당대표자회 성명 채택

o 당조직문제(당중앙위원장제 폐지 및 총비서 직제로 개편, 선거)

1,323명

5차

당대회

'70.11.2-13

(12일간)

o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o 인민경제발전 6개년계획('71~'76)

o 당규약 개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

1,871명

6차

당대회

'80.10.10-14

(5일간)

o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80년대 10대 경제전망목표 제시, 고려민주 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천명)

o 당규약 개정

o 당중앙지도기관 선거(김정일 당 정치국 상무위원 선출)

3,220명


(출처 - 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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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급' 잠수정, 중어뢰 장착할 수 있나?
천안함 조사발표 의문점.."130톤급 잠수정은 중어뢰 못 실어"
2010년 05월 20일 (목) 21:26:32 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민.군합동조사단은 20일 천안함 조사 발표에서 '연어급 잠수정'이 서해안으로 침투해 천안함에 중(重)어뢰를 발사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군사 전문가들은 '상어급(300톤급)'보다 작은 '연어급(130톤급)' 잠수정이 중어뢰를 장착하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합조단은 이날 천안함 침몰 2-3일 전에 모함인 상어급 잠수함과 연어급 잠수정이 북한 해군기지를 이탈했다가 침몰 2-3일 이후에 기지로 복귀했다고 설명했다.

황원동 합조단 정보본부장은 "사용된 어뢰 종류, 수심 등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연어급 잠수정 1척이 본 도발에 운영됐을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북한 '연어급 잠수정'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재원이다. 이날 합조단은 북한군이 연어급을 포함한 소형 잠수정 10여척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어급 잠수정 재원에 대해 황 본부장은 "대부분 상어급 잠수함과 유사하다"며 "수출형으로 건조됐고 최근에 건조해 야시 장비를 포함한 고성능 장비를 구비하고 은밀성을 높이기 위해 선체를 특별하게 건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 소형 연어급 잠수함이 중어뢰를 싣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날 합조단이 천안함에 사용된 어뢰와 크기와 형태 등 설계도면이 일치했다고 밝힌 북한산 CHT-02D 어뢰는 직경 21인치, 무게 1.7톤으로 폭발장약이 250kg에 달하는 중어뢰다.

한 안보 전문가는 "300톤 이하 잠수정은 경(輕)어뢰 2개 정도를 실을 수 있지만 중어뢰는 못싣는다"며 "1,800톤급은 되어야 폭발장약 250kg 중어뢰를 장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형 잠수정은 250kg 규모의 폭발장약의 발사 반동은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잠수정은 정보탐지용으로 적에게 노출될 때 자위수단으로 경어뢰를 사용한다"며 "중어뢰는 자위, 공격 겸용지지만 잠수정에 쓰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합조단이 천안함 침몰 폭발력과 서해 해저 지형 등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연어급 잠수정'이라는 새 재원을 만들어냈다 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군사 전문가 김종대 D&D FOCUS 편집장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잠수함이 나왔다"면서 "상어급은 너무 커서 연안에 못 들어오고, 잠수정은 중어뢰를 장착하지 못하니까 연어급 잠수함이라는 것으로 짜 맞춰낸 것일 수 있다"고 짚었다.

종합해보면, 시뮬레이션 결과 천안함 침몰에 200-300kg 규모의 폭발이 있었다는 점에서 먼저 무기를 '중어뢰'로 규정해 놓고, 수심이 얕은 서해안에서 운용할 수 있으면서도 중어뢰를 실을 수 있는 새로운 '연어급 잠수함'을 만들어 냈다는 지적이다.

한편, 미국 CBS뉴스가 19일(현지시간) "미국, 영국, 호주 조사단을 모두 조사결과에 지지를 표했으나, 오직 스웨덴 조사단은 북한을 배후로 지목하는 것을 주저했다"고 보도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날 윤덕용 민.군합동조사단장(민간)도 이날 조사발표를 마친 뒤 '스웨덴 측은 북한 공격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스웨덴 측은) 상선을 주로 (조사) 하던 곳이라 그런 것 같다"고 사실상 시인했다.

하지만 박정이 민.군합동조사단장(군)은 이날 조사발표에서 "참석한 외국조사단 모두가 완전하게 일치를 보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견해를 일치하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겠다"고 공식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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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조사발표, 해명과 남은 의문점
'손으로 쓴 1번', '잠수정 침투경로', '공개된 설계도면'?
2010년 05월 20일 (목) 14:30:07 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민.군 합동조사단이 20일 "천안함은 북한제 어뢰에 의한 외부 수중 폭발의 결과로 침몰됐다"고 결론 내렸다.

이날 합조단의 조사발표는 천안함이 어뢰 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집중 부각됐지만, 어뢰와 북한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데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다는 평가다.

어뢰 잔해물, 소개 팜플릿에 나와 있는 '설계도면'?

   
▲ 천안함 침몰원인을 조사해온 민.군 합동조사단이 20일 오전 10시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조사결과를 공식 발표하는 가운데 백령도 사고지역 근해에서 쌍끌이 어선이 수거한 결정적 증거물인 어뢰 추진체와 관련해 윤덕용 공동조사단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합조단은 이날 '결정적 증거물(스모킹 건)'로 지난 15일 쌍끌이 어선이 함미 부근에서 인양한 '어뢰 잔해물'을 제시했다. 이 어뢰 잔해물은 어뢰의 추진 동력부인 프로펠러를 포함한 추진모터와 조종 장치로 이뤄져 있다.

이를 두고 합조단은 "(어뢰 수거물이) 북한이 해외로 수출할 목적으로 배포한 어뢰 소개 자료의 설계도에 명시된 크기와 형태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제시된 북한 어뢰 설계도는 북한산 무기소개책자에 제시되어 있는 CHT-02D 어뢰의 설계도면이라고 합조단은 전했다. 하지만 통상 군사 기밀상 소개 책자에 이같이 무기의 자세한 설계도면을 싣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는 지적이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황원동 합조단 정보본부장은 "어뢰 CHT-02D 팜플릿은 출처 보호 및 기타 보안 사항 때문에 입수 경위를 설명할 수 없다"면서 "팜플릿에 어뢰의 제원, 특성, 설계 도면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해명했다.

일각에서는 이 어뢰 잔해물이 천안함 공격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조류가 빠른 서해안 특성상 북측에서 흘러 내려왔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합조단은 어뢰 잔해에 흡착되어 있는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천안함 함수, 함미, 연돌에 흡착되어 있는 물질과 동일하다며 이같은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 흡착물은 '비결정체 알루미늄 산화물'로, 어뢰의 버블제트 효과를 위해 사용된 알루미늄 분말이 폭발로 인해 산화.냉각된 흔적이라는 것이 합조단의 설명이다.

손으로 쓴 '1번' 한글 표기.. 폭발 후에도 남았다?

   
▲ 백령도 사고지역 근해에서 쌍끌이 어선이 수거한 결정적 증거물인 어뢰 추진체 한 부분에 매직으로 '1번' 이라고 씌여져 있다.[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또 다른 스모킹 건으로 제시된 '1번'이라는 한글표기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더욱 커 보인다.

수거된 어뢰잔해물의 추진부 뒷부분 안쪽에는 파란색 사인펜을 사용해 손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1번'이라는 표기가 뚜렷이 남아 있다.

합조단은 이미 확보하고 있는 북한산 어뢰에 '4번'이라고 쓰인 표기방법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이 번호는 어뢰 부품의 조립이나 정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합조단이 확보하고 있는 북한산 어뢰는 연습용으로 폭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4번'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수중에서 고온.고압으로 폭파된 어뢰 잔해물에 각인된 것도 아닌 사인펜으로 쓴 글자가 남아 있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합조단 조사발표에 앞서 '1번' 한글표기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기자들과 전문가들은 한글표기가 어뢰 철판에 각인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사인펜으로 쓴 표기가 공개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윤종성 합조단 과학수사분과장 "잉크에 대한 분석은 장기간 걸리지만 확인은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즉, 아직 잉크에 대한 분석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북한 잠수정의 침투경로 .. 국방부 말 바꾸기?

천안함에 접근해 어뢰를 쐈다는 북한 잠수정의 침투 경로에 대해서 합조단은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이날 합조단은 연어급 잠수함정 1척이 서해 공해상 외곽으로 우회 침투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이 근거로 서해 북한 해군기지에서 운영되던 소형 잠수함정(연어급)과 이를 지원하는 모선(상어급)이 천안함 공격 2-3일 전에 기지를 이탈했다가 천안함 공격 2-3일 후에 복귀한 점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같은 설명은 당초 국방부의 입장과 상충되는 것이다. 한 달 전 북한 잠수함 침투설이 보도되자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4월 14일 국방위에 출석해 "북한 잠수함 2척 정도가 관측되지 않은 것만 가지고 그 배들이 내려왔다고 입증할 만한 것은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국방부 정보분석 결과가 달라진 추가 정황이 있나'라는 질문에 손기화 정보분석분과장은 "북한군 잠수함정 두 척이 기지를 이탈했고 그것을 식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라면서도 "이 사건으로 인해 특별히 정보 판단이 달라질 것은 없다"고 시인했다.

즉 북한 잠수정의 침투경로는 단순 추정일 뿐이다. 국방부가 천안함 원인의 주체로 북한을 지목하면서 침투경로도 이에 끼어 맞췄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침투경로 뿐만 아니라 도주경로를 묻는 질문에 대해 황원동 합조단 정보본부장은 "도주 경로는 도발한 이후 신속히 현장을 이탈해 침투한 경로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인다"라는 답변 밖에 하지 못했다.

그는 "수중 잠항이 시작되면 현재 어느 나라의 기술로도 분명하게 추적하는 것은 제한적인 것이 현실"이라며 "이번 사태 시에 기지를 이탈하는 것을 식별했지만 우리 해역까지 침투해 도발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라며 잠수함에 대한 부족한 정보수집 능력을 시인했다.

어뢰 폭발 각종 증거 제시... 물기둥은 설득력 부족

이날 합조단은 많은 근거를 제시해 천안함 침몰 원인으로 '어뢰 폭발'로 결론지었지만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띈다.

합조단이 어뢰 폭발의 근거로 제시한 점은 함체의 변형된 모습, 선저 부분 수압 및 버블 흔적, 열 흔적이 없는 전선의 절단, 초병의 물기둥 목격 진술, 사체검안 결과 등이다.

이 중 함체 변형이나 선저 버블 흔적은 비결정체 알루미늄 산화물 흔적과 함께 어뢰 폭발 가능성에 무게를 주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어뢰 수중 폭발 시 발생하는 물기둥에 대한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생존자 중 충격으로 쓰러진 좌현 견시병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는 진술과, 탈출 당시 물웅덩이에 발이 빠졌다는 진술은 100미터 높이로 치솟는 물기둥 대한 근거로 미약해 보인다.

특히 백령도 해안 초병이 2-3초 간 높이 약 100미터 백색 섬광 기둥을 관측했다는 진술 내용도 여러 번 번복된 바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합조단의 이날 조사결과 발표에 근거해 대북 제재조치 등을 내놓을 예정이지만 조사결과에 대한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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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융합 반응에 성공... 태양절에 '인공태양'이라...

통일외교국방 2010. 5. 12. 11:00
태양절에 '인공태양'을 만들었다네요. 북한은 참 상징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나 저나 핵융합 기술이 수소폭탄까지 이어질 지, 아니면 정말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활용으로만 갈 지 말이 많네요. 에너지 상용화까지는 좀 먼 이야기 같고... 암튼 저는 좀 더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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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핵융합 반응에 성공했다"
<노동신문> "새 에너지 개발을 위한 돌파구가 확고하게 열려"
2010년 05월 12일 (수) 10:08:56 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북한이 핵융합에 성공했다고 12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태양절을 맞는 뜻깊은 시기에 조선의 과학자들이 핵융합 반응을 성공시키는 자랑찬 성과를 이룩했다"고 전했다.

이어 "이 과정에 우리 식의 독특한 열핵반응장치가 설계제작되고 핵융합반응과 관련한 기초 연구가 끝났으며 열핵기술을 우리 힘으로 완성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과학기술 역량이 마련됐다"고 밝혔다.

신문은 "핵융합의 성공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조선의 첨단과학기술의 면모를 과시하는 일대 사변"이라며 "조선에서 핵융합에 성공함으로써 새 에네르기(에너지) 개발을 위한 돌파구가 확고하게 열렸으며 나라의 최첨단 과학 기술 발전에서는 새로운 경지가 개척되었다"고 밝혔다.

또 "부족하고 어려운 것이 많은 속에서도 우리의 과학자들은 사소한 주저와 동요도 없이 제기되는 수많은 과학 기술적 문제들을 100% 자체의 힘으로 해결함으로써 마침내 핵융합 반응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신문은 "핵융합기술은 인류가 이상하는 새 에네르기 개발을 위한 최첨단 과학 시술 분야의 하나로서 '인공태양' 기술이라고도 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핵융합 기술이란?

1억℃ 이상의 고온에서 가벼운 원자핵이 융합하여 더 무거운 원자핵이 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창출해 내는 방법이다. 이 과정을 이용하여 수소폭탄이 만들어졌다. 이 핵연료는 무한하며, 방사성 낙진도 생기지 않고 유해한 방사능도 적다. 태양이 빛에너지를 발생하는 방식과 비슷해 '핵융합'을 '인공태양' 기술로 일컫기도 한다. 
<참고 : 네이버 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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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임기 내 남북관계 '올 스톱'?

통일외교국방 2010. 4. 27. 16:43

<초점> 남북 강대강 '대결 국면', 어디까지 갈까?
"北, 4월말 총화. 강경기조 앞당겨져"...천안함 결과 주목
2010년 04월 26일 (월) 18:05:44 정명진 기자 mjjung@tongilnews.com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경색되어 왔던 남북관계가 임기 3년차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확대되어 왔던 남북관계가 이명박 정부 내에 전면 차단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화공세'를 이어오던 북측은 금강산 관광 재개 불발을 계기로 강경으로 돌아섰고, 남측 당국도 이에 맞서 '행동'을 수반한 강력대처를 천명한 상태다. 남북이 '강대강' 대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천안함 침몰'이라는 돌발 사건까지 더해지면서 위기가 증폭되고 있다.

"北, 4월말-5월초 총화.. 군부 등 강경파 목소리 강화"

지난해 8월 초 현정은 현대 회장의 방북, 북한의 DJ조문특사단 방남 등으로 시작됐던 북한의 유화기조는 올해 2월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 당국 간 회담이 뒤틀어지면서 강경기조로 옮겨갔다.

북측의 향후 대남 기조는 어느 정도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자제해온 북한이 8개월여 만인 지난 17일 '군사논평원'의 입을 빌어 '이명박 역도'라고 지칭했다. 이는 '강경기조'로의 대남기조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는 평이다.

당초 북측은 대화기조를 올해 상반기까지 이어갈 계획이었으나 남측의 호응이 없자 강경기조로의 전환을 앞당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 2월 원동연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베이징에 나와 남측 고위 인사와 접촉을 타진하다가 불발되면서 대화파에 대한 북 내부 평가가 나빠졌다는 전언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이 4월말, 5월초에 (남북관계를) 총화 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번에 군부 등 강경파 목소리가 반영돼 기조가 서면 대화파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며 "아마 상당기간 그런 기조로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다른 소식통도 "작년까지만 해도 대화기조가 8월까지는 간다고 했는데 앞당겨 진 것 같다"면서 "금강산 관광에 대해 초강경으로 나온 것도 정해진 계획을 미리 취한 것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4월말 총화가 끝나면 대남 계획들이 체계적으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봤다.

최근 남측이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이명박 대통령이 '태양절(김일성 주석 생일)' 행사를 공개 비난한 것도 북측에 초강경대응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이다. 북한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이 지난 23일 금강산 관광지구 내 당국 자산 몰수, 민간 자산 동결 등 초강경 조치를 밝히면서 '천안함'과 이 대통령 '태양절 발언'을 문제 삼은 게 이를 뒷받침한다.

北, 금강산에 이어 개성공단까지 재검토
南, 남북 민간교역 축소 검토... 천안함 결과 주목

최근 북한 국방위원회가 직접 개성 공업지구(19-20일)와 금강산 관광지구(22-23일)를 방문해 현황 파악에 나선 것은 북한 내부에서 군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실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북한 군부가 남북관계 최일선에 나서면서 개성공단 폐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개성공단 개방은 북한 군부가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사안이다.

지난 8일 북한 명승지지도국은 "남조선 보수패당이 우리의 성의 있는 노력을 우롱, 모독하고 공동선언의 정신과 민족의 지향에 배치되게 대결의 길로 계속 나가는 경우 개성공업지구사업도 전면 재검토되게 될 것"이라고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남측 정부는 '행동을 수반한 강력 대응'을 천명하고 있지만, 그동안 쌀.비료 지원을 중단하면서 대부분 대북 지렛대를 상실한 상황이다.

일단 정부는 금강산 몰수 조치에 대한 대응 카드로 남북 간 민간교역을 축소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같은 제재조치의 효과에 대한 대북전문가들의 분석은 극히 회의적이다.

북한 선박의 제주해협 통행 제한 조치가 또다른 제재조치로서 거론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북한이 남측 항공기의 북측 영공 통과 제한으로 맞대응 할 가능성이 높아, 섣불리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나아가 금강산 관광지구와 개성 공업지구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남측이 민간교역 축소 등 맞대응 전략으로 접근하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강경조치가 반복되면서 남북관계 파탄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다.

향후 정세와 관련, 가장 눈여겨봐야할 대목은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 발표이다. 전문가들은 국제사회가 조사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객관적인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사고 원인을 북한으로 돌리기는 힘들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정부가 '북 관련설'을 공식화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한 대북전문가는 "천안함 원인이 북한으로 발표된다면 한반도 안보는, 지난 두 차례 북핵위기보다 더 위험한,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위기 상태가 될 것"이라며 "이에 대해 군사적 조치로 간다면 결국 남북 모두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물 건너 간 '남북정상회담'... 돌파구 안 보이는 남북관계

현재의 '강대강' 대결국면에서 문제는 돌파구를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올해 초부터 대두됐던 남북정상회담도 물 건너간 분위기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3일 전직 대통령 오찬 자리에서 "직간접적으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타진이 있었지만 임기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한 번도 안 만나도 된다는 일관성을 견지해왔다"고 밝혔다.

남북 당국이 직접 관계 개선을 모색할 여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남북 민간교류를 축소시키고 있는데다 6자회담 역시 한국이 발목을 잡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민간과 국제사회의 역할마저 차단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는 "게임이론에서 강대강 맞대응 전략의 단점을 보완하는 수단은 중재자의 역할"이라면서 "중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와 민간급을 활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측이 강경으로 나가면서 자존심 때문에 태도를 바꾸지 못할 때는 국제사회나 국민여론을 통해 대화로 가야하는데 그런 상황이 안 되고 있다"며 "강대강 맞대응 전략의 단점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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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졸브 비난, 북한 판문점 대표부 대변인 성명 <전문>

통일외교국방 2010. 3. 8. 11:54



온 겨레와 세계진보적인류의 거듭되는 항의규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은 끝끝내 우리 공화국을 겨냥한 《키 리졸브》, 《독수리》합동군사연습을 강행하는 길에 들어섰다.

연습에 투입하기로 된 미 륙, 해, 공군작전집단은 이미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 기동전개하였으며 미국상전의 총알받이인 남조선군무력은 완전한 출전태세에 진입하였다.

3월 8일부터 남조선전역은 말그대로 화약내 풍기는 반공화국전쟁연습마당으로 변하게 된다.

이번 합동군사연습의 강행은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이야말로 이 땅에 전쟁을 몰아오는 평화의 교란자, 불을 즐기는 호전광들이라는것을 다시한번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의 안중에는 교전쌍방이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조선반도의 경외로부터 군사인원과 각종 무장장비의 반입, 증강을 하지 못하게 된 정전협정 12, 13항의 요구도 북남불가침합의사항도 사라진지 오래다.

정전협정의 란폭한 유린자, 북남불가침합의의 고의적인 파기자로서의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의 정체는 더는 숨길수 없게 되였다.

조성된 사태와 관련하여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는 위임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우리 혁명무력은 더이상 정전협정과 북남불가침합의의 구속을 받지 않을것이다.

교전일방이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대화일방이 불가침합의를 줴버린 이상 우리만이 그에 구속될 리유가 없다.

이제부터 우리 혁명무력은 아무런 제약도 받음이 없이 자위력을 결심한 그대로 당당하게 행사하게 될것이다.

우리의 체제《붕괴》와 《급변사태》 조장을 목적으로 작성된 상전과 주구의 침략적인 작전계획이 실전연습으로 강행되고있는 오늘의 사태를 그대로 수수방관할 우리 군대와 인민이 아니다.

2. 이번 합동군사연습의 성격자체가 핵전쟁연습, 북침전쟁연습으로 락인된 조건에서 조선반도의 비핵화과정은 부득불 중단될것이며 우리의 자위적인 핵억제력은 더욱더 강화될것이다.

합동군사연습을 구실로 우리의 령해, 령공, 령토를 위협하는 미국의 핵공격수단에 우리 혁명무력의 강위력한 핵억제력으로 대응하는것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는 자위적권리이다.

상대가 총으로 위협하면 대포를 내대고 핵으로 공갈하면 보다 강한 핵억제력으로 맞서는것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고유한 대응방식이다.

3. 평화가 소중하고 민족적화해와 협력이 귀중하다고 해도 상대가 우리를 어째보려고 덤벼드는 조건에서 우리 혁명무력은 무자비한 물리적힘을 행사하는 길로 나가게 될것이다.

평화협정체결을 바라지 않고 화해와 협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실지 군사적힘으로 맞붙어 결산을 보자는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위협과 공갈에도 끄떡하지 않는 천만군민의 강의한 정신력이 있으며 그 어떤 무모한 도발과 침략도 단매에 짓뭉개버릴수 있는 강력한 군사적타격력이 있다.

4. 우리를 겨냥한 전쟁연습이 계속되는 한 조미사이, 북남사이의 모든 군부대화는 단절될것이다.

총부리를 겨누고 핵전쟁구름을 몰아오는 상대와 마주앉아 그 무슨 《평화》와 《협력》을 론한다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은 무분별한 군사적경거망동으로 얻을것이란 쓰디쓴 수치와 파멸뿐이라는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자료제공 -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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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하기도 지루한 남북관계

통일외교국방 2010. 3. 3. 12:50

통일부 출입한지 이제 만 8개월 정도 됐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그나마 남북대화가 이어지고 있는 게 다행이지만,
맨날 제자리 걸음이다. 남북대화를 하더라도 맨날 실무회담, 실무접촉이다.
딱 한번 지난 9월 이산가족 상봉 취재를 위해 금강산 현장에 갔던 것을 제외하면,
남북대화가 있어도 기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화 취재나 통일부 브리핑 취재가 전부다.

기자실에 있는 기자들도 지쳐 가는 듯.
참여정부 때는 보도자료 정도로 처리해도 됐던 실무회담, 실무접촉이 끝날 때까지
밤늦게 기자실에서 소위 '뻗치기'를 해야하는 현실이니...

어제 개성에서 열린 '3통문제 협의를 위한 남북실무접촉'도 그랬다.
밤 9시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에 잡힐만한 합의도 못하고 내려온 통일부 과장급 수석대표를 잡고
이것 저것 캐묻는 게 고작이다.

장관급 회담이다, 총리급 회담이다, 정상회담이다 하면서 
개성, 금강산을 밥먹듯이 갔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정부 공식행사가 아니더라도 민간단체 방북행사나 언론사 단독 방북취재를 위해 평양을 찾았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지난 2008년 7월 금강산 박왕자씨 피격사건이 터지던 그 날,
나는 평양에 있었다. 북한 IT현황을 취재하기 위해 통일뉴스는 단독으로 방북 취재 중이었다.
그 때는 평양에서 직접 북측 관계자들에게 피격사건을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요즘 언론들은 각종 대북인권단체 소식지에서 날아오는 소식들을 베끼기에 급급한 듯 하다.
북한에서 화폐개혁으로 인민들이 봉기를 했다던지, 범죄가 들끓는다던지,,,
기자로서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기사를 쓸 수 있을까.

기자에게 현장은 생명과 같은 거라고 했다.
통일부 기자의 현장인 북한을 직접 가보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참 지루하고 착찹한 남북관계다. 

2010.3.3 점심 먹기 싫은 날,
통일부 기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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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NLL 포사격, 정세 영향 '제한적'일 듯

통일외교국방 2010. 1. 28. 16:15

북한이 어제부터 이틀 째 서해안 NLL(북방한계선) 인근 지역에서 해안포 사격을 실시했습니다.
러시아 해상교통 문자방송 나브텍스(NAVEX)에 통보한 해상사격 일시가 1.25-29일까지 였다고 하니,
이번주까지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이 NLL을 향해 해안포 사격을 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NLL 북측 해상에서 이뤄지고 있는 만큼 지난 11월 서해교전처럼 군사적 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첫 포사격이 있었던 27일 언론들은 방방 뛰었지만, 
이번 포사격이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내일 아침 신문에서는 '톤다운'되어 있겠지요.

북측의 의도도 그렇지만,(북측 의도는 보도가 많이 됐지요, 평화체제 부각, NLL 문제 의제화 등, 대화와 압박 병행하는 강온전략) 남측의 대응이 눈에 띕니다. 

이번 포사격으로 이명박 정부로서 국내 반북여론을 키울 수 있는 기회인데 그렇게 활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제 청와대에서 '감정적인 보도'는 삼가해달라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2월 1일로 예정된 개성공단실무회담도 계획대로 추진한다고 하고,
포사격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대북인도적 지원 민간단체들의 방북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짐작해보면 이렇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북.미간 평화체제 논의가 급물살 탈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체제 논의에서 남측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긴장감이 있는 것이지요.

또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도 여러 정치적 득실을 따졌을 때, 
올해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려는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올해 상반기 중으로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구체적인 일정도 따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암튼 그 의지가 맨날 이명박 정부가 하는 이야기 처럼 '진정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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