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세력 눈치보며 '납북자' 들이밀기, '공동취재단' 원칙깨고 '선별통보'

3일간의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 추석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합의됐다. 60여년 동안 갈라져 살아온 이산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남북 당국과 양측 적십자사에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통일부는 회담기간 동안 언론을 상대하면서 큰 오점을 남겼다. 현 정부 들어 처음 진행하는 남북간 공식 회담이긴 하지만, 경험 부족에서 오는 '미숙함'이라기보다 ‘구태의연한’ 언론플레이에 가까워 보인다.

보수층 눈치 보며 '납북자' 카드 흔든 뒤 '아닌 보살'

이번 적십자 회담 결과만 놓고 보면,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원-포인트 회담이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사이의 사전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추석 이산가족 상봉'은 무난히 합의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분위기는 둘째 날인 27일 오전까지 이어졌다. 남측이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3대 원칙을 제기했을 때만해도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는 말 그대로 '원칙'적인 언급이었다.

이때까지 남북은 추석 즈음해서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갖자는 큰 틀에 이견이 없었고 단지 상봉 일자와 상봉행사 장소 등 지엽적인 부분에 대한 의견차만 존재했다.

그러다 난데없이 이날 오후부터 남측 대표단은 '납북자.국군포로'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라고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남측 회담 관계자는 "전쟁 시기 및 전후시기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납북자.국군포로)에 대한 문제도 합의서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 문제에 대해 과거정부와 다른 '새로운 형식'으로 하자고 북측에 제안했지만, 그렇다고 남측이 '새로운 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금강산 현지 소식을 기다리며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 프레스센터에서 대기하던 통일부 기자단들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보수성향의 이명박 정부가 이 문제를 고집할 경우 추석 이산상봉까지 무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남측 대표단의 입장은 둘째 날 밤늦게까지 유지됐다. 금강산 현지에서 진행된 마지막 남측 회담 관계자의 브리핑에서도 입장 변화는 없었다. 기자단 사이에서는 이 문제로 합의서 도출이 어려워 회담이 하루 더 연장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다음날인 28일 오전, 상황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남측이 납북자.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합의문 명시를 더 이상 고집하지 않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는 것이다.

회담 관계자는 "납북자.국군포로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회담에서 조속한 해결을 촉구한 만큼 북측도 이 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인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이 정도로 북측에 요구했으면 만족할 만하다는 이야기다.

전날 '납북자.국군포로 문제'가 포함되지 않으면 합의서를 작성할 수 없다면서 강경한 태도를 취하던 남측 입장이 하루아침에 돌변한 것이다.

결국 둘째 날 이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 것은 최근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서 보수층을 달래기 위한 언론플레이였던 셈이다. 이같은 구태의연한 언론플레이가 되살아난 것도 꼴불견이지만 이쯤에서 끝났으면 그나마 잔매를 맞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특이할 만한 것은 방송사와 유력 일간지는 남측의 입장이 변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나 있었다는 듯, 이날 아침 뉴스와 조간신문에서 전날 저녁의 어두운 회담 전망은 빼고 ‘이산가족 합의 분위기’로 바꿨다는 점이다.

하지만 인터넷 신문을 비롯해 몇몇 일간지들은 28일 오전에도 ‘여전히 남북간 입장차가 팽배해 합의가 어렵다’는 기조를 그대로 이어갔고, '회담 일정 연장 가능성'을 언급한 일부 신문들은 결국 '오보'를 냈다.

<통일뉴스>도 물론 '남측 무리한 요구로 입장차 못 좁혀'라는 제목으로 회담 둘째날 ‘최종신’ 기사를 다음날 오전까지 탑기사로 배치해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둘째 날 밤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통일부, '공동취재단' 원칙 뭉개고 '메이저'-'마이너' 차별까지

둘째 날 밤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공동취재단'이라는 취재 방식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번 회담과 같이 남북간 회담이 진행될 경우 모든 매체가 금강산 등 북한 지역으로 가서 취재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풀 기자단' 즉, '공동취재단'을 구성한다.

공동취재단에 포함된 몇몇의 기자들만 현지로 투입되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사를 전송한다. 나머지 대다수의 통일부 기자들은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공동취재단이 보내는 정보와 기사를 받아서 각 매체별로 기사를 작성하는 형식이다.

회담 둘째 날 밤 전말은 이렇다. 27일 밤 10시 30분 경 금강산 현지에서 진행된 브리핑이 끝나고 공동취재단은 마지막 '풀 기사'를 프레스센터로 보내왔다. 마지막 '풀 기사'는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로 남북이 팽팽히 맞서고 있고, 적십자회담 일정이 하루 더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통일부의 서울 상황실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금강산 현지에 있는 회담 상황실이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를 지나치게 수위높게 밀고 나갔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울 상황실은 금강산 현지 상황실에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에 대해 수위가 너무 높게 나갔으니 톤다운해서 추가 브리핑을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서울 상황실 지시에 따라 금강산 현지에서 추가 브리핑을 마쳤을 때, 서울 삼청동 프레스센터의 기자단은 이미 철수한 상황이라 풀 기사를 전송할 수 없었다.

결국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로 언론플레이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 상황실과 금강산 현지의 회담상황실이 서로 손발이 맞지 않은 꼴이 되어 버렸다.

또다시 서울 상황실이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통일부 차관과 대변인이 직접 나서 언론사에 개별적으로 연락해서 이런 상황을 설명했다. '추석 이산가족 상봉 일정도 추석 이전으로 하기로 가닥을 잡았다'라는 새로운 팩트(fact, 사실)도 함께 전달했다.

이런 개별접촉은 ‘메이저’와 ‘마이너’로 나눠 선별적으로 이뤄졌다. 다음날 28일 아침 서울 삼청동 프레스센터에 출근한 기자단은 전날 차관이나 대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매체'와 '연락을 받지 못한 매체'로 나눠져 있었다.

당연히 '연락을 받지 못한 매체'의 항의가 빗발쳤다. "통일부 기자단은 이제 1부 리그와 2부 리그로 나뉘는 것이냐"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이같은 비난에 통일부 천해성 대변인은 이날 오전 공식 브리핑 자리에서 전날 밤 상황을 설명하며 "현지 풀기자단과 프레스센터 기자단 사이에 혼선 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대해 유감이며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통일부 대변인실이 더 큰 신뢰를 잃은 부분은 자신들이 강조해오던 '공동취재단'의 원칙을 스스로 깼다는 점이다.

프레스센터의 기자단들이 회담과 관련해서 질문을 할 때마다 천 대변인은 '현지에 회담 대변인이 따로 있고 풀 취재단도 있기 때문에 서울에서 회담 관련 사항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는 취지로 '공동취재단' 원칙을 지켜줄 것을 거듭 당부해왔다.

이런 점에서 통일부는 ‘공동취재단’의 원칙을 깬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도 없다.

더구나 이번 적십자회담을 취재하면서 '유력 언론들만 잘 관리하면 된다'라는 구태의연한 태도가 여전히 통일부 내에 남아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쩌면 이러한 언론관은 통일부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언론을 대하는 본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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